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많은 신기한 기적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했고, 심지어 바울의 소지품 조차도 병을 고치고 악한 귀신을 내쫓는 놀라운 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행 19:18~19)
에베소의 이런 변화를 본 바울은 이제 떠나도 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빌립보/데살로니가/ 베뢰아가있는 마게도냐, 그리고 아가야의고린도에서 미리 준비시킨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 후 그 다음에는 로마까지 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자신이 가기에 앞서 바울은 디모데와 고린도성의 재무관인 에라스도를먼저 보냈습니다. 주된 방문 목적이 구제 헌금을 모으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준비를 시키려는 배려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행 20:3)
거액의 구제 헌금을 가지고 이동하는 것이라 회계 감사격으로 각 지역 교회 출신의 여러 사람들이 동행하였습니다. 마게도냐에서는베뢰아의정치인 소바더, 데살로니가 출신 아리스다고와세군도, 갈라디아에서는 더베출신 가이오와루스드라출신 디모데,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두기고와 드로비모가함께 하기로 해서드로아항에 그들이 먼저 가서 바울을 기다렸습니다.
선지자 아가보의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의 수난 예고와 밀레도에서의 바울의 고별설교
바울은 오순절 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를 원했기에 에베소는 들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바울은 사람을 보내어 멀지 않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까지 와달라고청해서 그들과 밀레도에서 작별인사를 하며 경계와 당부의 말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에베소 장로들과의마지막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하니” (행 21:13) 하루를 보낸 후 가이사랴항에 도착해 전도자 빌립집사의 집에 며칠을 묵었습니다. 그 기간에 10여년전천하에 큰 흉년이 들것을 예언했던 예루살렘 선지자 아가보가 집을 찾아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묶어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만류했으나 바울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주후57년 밀레도에서 모인 에베소 장로등에게했던말을 떠올리면서 예루살렘으로오르면서 에베소의 장로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직막 말을 남기기도 합니다.
"29 내가 떠나가면 사나운 이리떼가 여러분 가운데 들어 와 양떼를 마구 헤칠 것이며 30 여러분 가운데서도 진리를 그르치는 말을 하며 신도들을 이탈시켜 자기를 따르라고할 사람들이 생겨날 것은 분명합니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언제나 깨어 있으시오. 그리고 내가 삼 년 동안이나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각 사람에게 쉬지 않고 훈계하던 것을 잊지 마시오"(행20:29-31) 라는말씀을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남깁니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걱정하면서 디모데 전서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면서 에베소 교회를 디모데에게 맡깁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 (딤전3;15)
바울의 힘겹게 모아간 모금을 바울의 헌금을 왜 예루살렘에서는 거부했는가?
예루살렘유대인들이 바울을 체포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바울의 복음이“율법”을 어겼다는 것 입니다,
둘째,바울이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달을수있을까요 그것은 유대에서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한것처럼 바울이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박해를 받았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의 위기 상황을 벗어나게 하십니다, 바울이 누구를 통해서 위기를 벗어났습니까?. 바울을 위기에서 건져낸 사람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아니라 “이방인 로마의 천부장”에 의해 죽음의 위기를 넘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바울의 고난의 사건들을 통해서 그 자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와 ‘복음 전파의 자리’로 변화 시키고 바울의 ‘모함과 핍박의 자리’를 ‘은혜의 자리’로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를 드러내십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도착과 체포바울의 예루살렘 모금 행위를
바울 신앙의 모험이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루살렘의 거부를 알고 있었지만 바울 신학의 모험이라고 읽은 것은 그의 일치 즉 에큐메니컬정신 때문입니다. 바울은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 예루살렘과 다른 이방인 선교를 하는 독자적 노선을 띠었지만 예루살렘회의의 에큐메니컬정신은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가난한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빚진 것으로 영적으로 빚진 것으로 해석하면서 물질적인 것으로 보답하면서 영육의 통합 에큐메니즘을 이야기 합니다.
최근 국회 청문회에 한의원과 한 목사가 성경을 가지고 논쟁을 하였습니다.
조배숙의원 최재형 목사 : 조배숙의원 "목사님이 그짓을했다고요. 목사가 맞아요?
가짜목사 아닌가 목회의 목적 영혼구원 아닌가 목사 신분 팔아 사람 뒷통수치는 목사?
“한국교회의 타락의 가장 큰 문제는 영혼 구원만 이야기 한다는데 있습니다,
물질 나눔이나 사회적 구원을 이야기하면 싫어 하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왜 영부인이 뇌물을 받았는데 분명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고발한 목사에게 자꾸
영혼 구원이야기만 합니다. 교회와 목사는 개인과 영혼 이야기만 하지 이웃과 사회와 정치에 관심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아서 할것이니 입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라 정치가 잘되고 있습니까?
신앙은 영혼만 개인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와 정치라는 통전적인 모든 삶의 차원을 구원하는 것 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헌금도 개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헬라 유럽교회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 헌금을 힘이 다하도록 한것처럼 영과 육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통합하는 에큐메니컬헌금 정신이 바로 바울의 헌금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시대의 교회의 헌금 정신은 교회 내부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넘어서야 하고, 돈 만이 아니라 시간적 마음적 선교의 헌금이 가장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는 이 통합돌봄의시대에 약대동의 세 교회가 물질과 시간과 몸의 헌신으로 통합돌봄시대의마을의 사회적 자본 만들어 나가는 것은 가장 예큐메컬하게 헌금 정신의 모범을 보이는 행위가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통합돌봄의시대는 교회의 헌금을 교회의 헌금만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을 공유라는 개념으로 헌금적개념으로 새롭게 읽어 낼수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랑이 더욱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 감사함으로 자발적으로 이러한 마음이 영적 육적 사회적 헌금과 자본이 되어
약대동 통합돌봄 마을에 이러한 물적적 영적 시간적 몸적인 봉사와 돌봄이 넘치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