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고린도서 12장에 성령론혹은 은사론이 나온 이유 공동체를 세우는 은사를 공동체을망치는 방법으로 쓰더라는것입니다.고린도 서의 은사장은 바로 이러한 방언의 은사를 비판 하기위에 쓰여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좋은 은사를 모두 개인적으로 자신의 우월을 드러내는 사적인 도구로 사용하면서 시작됩니다.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부를 과시하면서 음식을 먼져먹었고, 지식있는자들은 자신의 지혜로 잘난체를했고, 영에 취한 여성들은 부부관계를 거부했고, 가난한 자들은 방언을 자기 우월성으로 삼았습니다.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은사장은 반드시 사랑장과 부활장과 연결해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성령론 은사론은 반드시 반드시타인 이웃을 생각하고 관계를 생각하고 공동체를 세우는데 사용되어야 하는데 개인화 사사화 되어서 공동체의 암 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교회의 은사는 반드시 공동체의 돌보고세우는데 사용되어져야 하기 때문 입니다
나의 은사는 무엇이고,우리교회의 은사는 무엇인가?
바울이라는 이름은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쓰지 않았던 이름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그러나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잠재력’의상징입니다. 우리의 잠재력은 선교적 잠재력(missional potential) 입니다. 사명에 대한 자각과 열정 없이 잠재력이 발현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무기력한 것은 사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신앙을 가지려면 먼져선교를 실천해야 합니다,
바다는 위험합니다.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곳입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배는 그러라고 만든 것은 아닙니다.”라는 말씀 처럼 먼져 배에 오르고 선교적 출항을 해야 우리의 정체성과 신앙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은사는 개인화 사사화 되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공동체와 이웃을 돌보고 세우는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2024년 6월 23일 문호교회에서한국일교수께서. 마을공동체를 섬기는 일을 강조하는 설교를 통해 한국교회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설교가 더 많이 전파되길 기원합니다. (임종한 교수)
이 설교에서 한교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의 3가지 신앙의 양태를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들으러 온 배고픈 사람들에게 “너희가 빵을 주라!”하실때우리가 예수를 따라온 것은 영혼구원을 위한것이지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는것은우리의 일이 아니다라는분리형 신앙의 모습입니다. 영과 육을 세상과 교회를 분리하는 신앙의 유형입니다,두번째 신앙의 유형은 현실주의적 유형입니다.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 빌립은이들을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이라는비용이 필요한데 그것은 현질적으로불가능한 일이라는 입장입니다.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설계할 때 혹은 교회의 미래를 의논할때우리는 늘 현실의 두터운 벽에 갇혀 우린 아무것도 할수없다고생각할때가있습니다, 빌립과제자들이 지금 그러한 상황에 있습니다. 빌립은이들을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이라는비용이 필요한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현실주의를 대변 합니다.그러나 현실과 현실주의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닥치고 있는 현실을 파악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이 현실주의가 되어 지금 내가 주어진 물질적 환경적 조건으로만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나와 우리 공동체의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현실에 가두는 현실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오늘 예수님처럼비록 200데라니온은없지만 너희가 그들을 먹이라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때그들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5000명을 먹이는 오병이어의기적을 일으킬수있습니다. 평생 마을목회을연구하신 한국일 교수님은 작은 마을 교회를 연구하신 결과 모든 작은 마을 교회들은 교인수와 교회의 재정은 작지만 할수있는 것부터,작게 시작하여,그 작은 빵5개와 물고기 두마리가첫 디딤돌이 되어 5천명이 먹고, 12 광주리가 남는 마을교회의 기적을 일으킨 교회들이라고 마을 교회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들을 내놓고 나눌때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뗜기적을 일으키시는 지를 아는 교회들이 바로 성령의 교회입니다. 배가 존재하는 것인 가만이 있기 위한것이아니라 거친 바다로 위험을 무릅쓰고 성령의 항해를 출발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도 성령의 신앙으로 선교적 마을 교회의 미래를 결단하며 나갈때우리의 정체성과 잠재적 가능성을 확인할수있는 것 입니다.
우리가 2024년 새해 목표를 ‘가자 돌봄교회 돌봄마을!’로 세웠을때 cbs 가 취재를 오고, 지속협에서 통합돌봄마을이 시작되고, 장신대에서 통합돌봄 마을을 소개할수 있는 경험을 체험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케 하시려는 성령의 계획임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래서 선교적 교회에서는 신앙이 다 형성된 이후에 우리가 선교적 항해를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져 선교라는 항해를 출발할때만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우리가 우리의 삶의 소명과 목적을 깨닫고,신앙의 정체성이 생긴다고 합니다. “불은 타오를 때만 불”이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이제 2024 우리의 선교적 항해의 목적인 “돌봄교회 돌봄마을”을 위해 우리 모두가 성령의 은사를 통해 이루어야할 성령의 항해도를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돌봄 제공의 주체가 가족에서 사회로 이동하고 있다 독거노인들은 이미자신은 아들과 며느리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밖에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노후의 삶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경험에서 것이다 나타나는 변화는 돌봄 제공의 주체가 가족에서 사회로 이동하고 있다
공적 돌봄(국가의 실패)과 사적 돌봄(시장의 실패) 사이:
사회적 연대 경제(공동체 돌봄)를 통한 돌봄마을 마을 중심의 공동체 돌봄은 첫째, 친밀, 자율, 열림을 현대 공동체의 원리로 제안하고, 선물·호혜적 경제, 소통을 통한 사회적 연대를 가능케하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둘째, 마을 중심의 공동체 돌봄은 관계적 가치를 중심•에 둔 우리 ‘사이’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임을 논의한다.셋째 이러한 마을 공동체의 상호 호혜적 관계와 신뢰에 기초하여 통합 돌봄, 돌봄 자원의 사회적 자본화와 지역화폐 ‘선물’을통한 사회적 연대 경제의 호혜적 관계망을 이루어 갈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18-19세기 자유민주주의가 봉건적 위계질서에 도전하며 ‘자유’의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된 민주주의였다면, 19-20세기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시장경제 위계질서에 도전하며 ‘노동’의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된 민주주의였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모두 정치적 평등을 향한 인류의 진일보한 성취임에 틀림없지만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나 계약의 산물로 본 약점이 있다. 돌봄민주주의는우리 사회를 개인들의 집합이나 계약의 산물로 보는 것을 넘어 관계적이고 상호의존적인사람들 간의 다양한 돌봄의 관계의 망으로 구성된 공동체로 본다. 이 돌봄의 관계망이란 돌봄 민주주의가 되어 신뢰와 상호관심, 사회적 연결과 사회적연대를 구축하는 필수적인 주춧돌이됨으로서돌봄이 배제된 사회경제의 위계질서에 도전하고 ‘돌봄’의가치를 중심으로 복지국가를 넘어서는 마을 단위의 돌봄 생활 민주주의를 실현할수있는 재편된 성숙한 민주주의이다
「돌봄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넘어」 .(김희강)
국가와 시장의 실패 시장중심의 일본 돌봄과 공동체 중심의 독일 돌봄
성령론은 반드시 반드시타인 이웃을 생각하고 관계를 생각하고 공동체를 세웁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돌봄을 시장에 맡기지 •않음으로서, 인간을 돌보는 일을 성스런 일로 받아어야합니다. 이제 우리사회가 돌봄을 시장에 맡길 것인지 아니면 비영리 영역으로 시민 종교 사회연대경제에 맡길 것인지를 일본과 독일 사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사회적돌봄의 가장 좋은 형태 공동체 돌봄
일본과 같이 돌봄을 시장에 맡겼을때, 개호는 가장 힘들고. 천한 일로 여겨져. 결국 외국인들이 하는 3D 업종으로 분류 됩니다.반면 독일에서 요양은 돌봄 영역으로 받아들여집니다.이 역시 힘든 일이기에 젊은이들이 참여가 적지만.돌봄을 시장에 맡기지 않고 시민 종교단체에 맡겨 자율성과 책임성을 부여했기에 돌봄 서비스의 높은 질을 유지하도록 했고,•시민들의 높은 자원봉사 참여를 가능케했습니다. 돌봄 위기의 대안, 마을에서의 공동체 돌봄은 마을 교회와 마을단위 종교협의회를 요청한다!! (임종한교수)
2045년에는 우리나라 65세이상고령자가 전체인구의 37.0%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고령국가가 된다. 초고령사회 진입에 대비해서 지역사회통합 돌봄이 마련되어야 하고,이를 위한 주거-의료-복지-돌봄간에유기적인협력이 시급하다. 한국사회 변화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함께 할수있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민간에서의 돌봄에 참여가 절실히 필요한데, 종교협의회을통해서 각 지역에서 상호 존중하고,협력할수있는 일들을 넓혀가야 한다.
이때 교회의 예배와 선교가 먼져 선교적으로 바뀌어지고,
교회가 성령의 교회로 변화될때 성령의 은사가 사유화되지 않고
공동체를 세우고 이웃을 돌보는데 사용되어 오늘 말씀의 주제인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12장1-11)하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 지기 시작하는 것 입니다.!!
선교적 예배는 지역 사람들의 성령의 은사 즉 달란트를 중요한 자원으로 여기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역이 각자의 신앙 공동체에 부여하신 영적 은사를 통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선교적 예배에서 메시지는 단순히 교회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복음의 말씀을 통해 성도의 삶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도전을 끊임없이 제기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약함은 그 메시지가 균형을 상실하고, 교회 자체 혹은 성도들의 필요에 부응한 설교에 머물기 때문이다. 소비주의 문화에 젖어 있는 성도들을 향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위한 메시지에 몰두한다면, 이타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선교적 삶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가 존재하는것인가만이 있기 위한것이아니라 거친 바다로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출발하는 것 처럼, 선교적 교회와 마을교회들은 지금 성령이 어떻게 도래하고역사하시는 지를 깨달고우리의 미래를 결단해 나가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해 나아가는 교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인도자 :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을 모으시고,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들을 채우시고, 새롭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며, 다시 하나님의 선교가 이루어지는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회중:우리 새롬교회의 예배는 주일 아침에 행해지는 일회적 행사가 아니라 우리 성도들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믿습니다.
인도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임재가 있는 진정한 예배를 갈망하며, 선교적 예배를 통해 교회의 무너진 기초가 회복되고, 우리 삶과 선교의 방향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매일 재설정되길 기도합니다,
다같이 : 무더위와 장마 한가운데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진정한 안식이 회복되는 계절이 되길 바라오며 이 모든 말씀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