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지난 6월 성령강림주일부터 초대교회와 성령과 바울에 대한 설교가 이어져
이제 두 번 남은 시간은 로마서를 통해 법과 정의 환대 은혜 선물이라는 주제로 로마서 말씀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바울 서신하면 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칭의론적 시각에서 다룹니다, 다시말해 이신칭의 즉 율법에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로마서의 핵심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종교개혁 정신과도 통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최근 로마서에 대한 획기적 새로운 시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인간 개인의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에 관한 새로운 관점은 바울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개인의 죄의 총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불의 (Unjust)에 기반하고 있음을 고발하는 서신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로마서 1:18의.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라는 말씀처럼
불의의 원인을 추적하다 보면 한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불의를 생산하는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관점은 로마서의 주제는 한 개인의
죄와 구원이 아닌 로마사회와 유대사회의 죄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새관점은 바울이야 말로 유대와 로마의 법이 인간 사회를 불의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인물이라고 봅니다,
다시말해 바울은 로마사회와 유대 사회전체가 불의한 공동체인 것을 고발하기위해 가장 기초적인 문제가 바로 이사회가 로마법과 유대법에 기초하여있기에 이 로마법과 유대법을 하나님의법으로 해체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관점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의 좋은 해법입니다,
최근 한국 사회는 검찰과 법무부의 갈등이 몇 달간 지속되고 있고
이것은 사실 우리가 새로운 사회로 건너가려면 법을 다루는 사람들
즉 검찰 공화국이 이대로 가야하나 해체하고 새롭게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이러한 생각을 할수 있었던
그 출발을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1. 바울은 길리기아 지방의 타르수스(다소)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로마 시민이며 바리새인이자 존경 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던 어떠한 결격 사유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2.그러나 그런 그가 다마스커스로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가면서 그가 이 서민 메시아를 탄압하면 탄압 할수록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고 믿고 있는 이 율법이 사실 율법을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만든것이고
그 율법이 사실은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을 차별 배제하고 있음을 서서히 깨달아가게 됩니다,
3. 그리고 그가 다메섹에 이르른 순간에는 그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메시아 처형 사건은 대중의 지지를 얻고 사랑을 받는 메시야를 법의 바깥에 서 있다고 그를 십자가형을 통해 처단한 법의 부당한 폭력 한 사건인 것이 그의 양심을 심하게 찌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바울은 자신이 믿는 유대교의 율법이란 결국 그 율법을 세운 집단에 봉사하고 폭력성 수단으로 율법밖의 존재를 차별 배제 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동시에 이 서민메시야 십자가 처형 사건은 사실
4. 당시 지중해를 연속적인 정복 전쟁을 구가하던 로마 제국과 로마로부터 공인된 종교의 지위를 승인 받은 유대교 간에 (암묵적으로) 진행된 모종의 공모에 의해 서민의 메시야 예수를 법밖의 사람으로 몰고가 최종적인 폭력 수단인 사형 제도로 끔찍한 폭력을 가한 사건임을 분명히 깨달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이 심화되던중 다메섹의 어느 시점에 도달했을 때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잡아 옥에 가두려 한 서민의 메시아란 실질적으로 율법에의해 처참하게 처형당한 것 같지만 사실 이 법밖의 사람들 가운데 부활하였고 그가 사실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린 진짜 메사야임을 깨닫는 신비한 체험을 하면서 그는 다메섹에서 꺼꾸러 집니다,
5. 바울이 이 부활한 메시아 체험을 하면서 그는 이 부활한 예수를 통해 법밖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구원하는 법밖의 하나님의 법인 하나님의 정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지키던 율법이란 법안에 유대인만을 살리고 법밖의 많은 약한 사람들과 이방인과 소수자들을 모두 차별 베제하는 하나의 도구인데 보라 저 법밖의 사람들이 믿는 예수라는 자들 우리가 율법으로 십자가에 죽여 높이 달았지만 지금 그는 사실상 부활하고 있찌 않은가 우리가 이 부활한 서민의 메시아 예수를 통해 지금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을수 없는 그 법밖의 모든 사람들 구원할수 있는 하나님의 정의를 발견할수 있겠구나하고 법밖의 메시아 백성을 모아 세운 것이 바로 에클레시아 교회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유대법과 로마법의 공모에 의해 처형된후 바울의 가장 큰 관심은 바로 로마법과 유대법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라는 서민의 메시야에게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법밖에 있는 당시의 수많은 노예와 서민들과 소수자들을 보았고 이들을 어떻게 보호하는 정의를 실현할수 있는 가를 보고 그 해답으로 로마법과 유대의 율법 밖에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법인 정의를 발견 하게 됩니다,
요즘말로는 비정규직 김용희님과 이땅에 들어온 난민들의 정의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인류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이후 바울에게 있어 메시아의 정의는 (율)법 바깥에 있는 것이며, 바울의 비판의 칼날은 로마서에서 로마법과 유대교 율법 양자 모두를 향하며 이 로마라는 메시야를 죽인 불의한 도시를 향해 쓴 피맺힌 하나님의 법
즉 정의를 외친 서신이 바로 로마서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밖의 정의 법밖의 새로운 법으로서 하나님의 법
메시아의 법 메시야의 정의를 주장한 것이 바로 로마서 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새관점의 등장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유태인인 데리다라는 세계적인 명성의 해체 철학자입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알제리라는 식민지에서 우등생이었지만 학교로부터 쫓겨난
바로 법밖의 난민 이방인의 경험이 있었던 그 경험으로 평생 주류법을 해체하고 법밖의 정의를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법밖의 정의를 가장 잘드러낼수 있는것이 바로 환대라고 주장합니다,
오늘 로마서을 읽는 교회는 법 밖에 있는 사람들의 정의 말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은 이 시대의 서초동에 있는 김용희 님 과 비정규직 난민을 위한
법 밖의 정의로 환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이 가장 잘드러나는 것이 바로 환대인데 이 환대란 무엇인가가
누가복음 11장 5절 기도 가르침에 드러나 있습니다,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누가복음 11장 5절 이할의 이 장면을 보면 기도장면에 구하라 할 때 한 사람이 급히 빵을 달라고 밤에 찾아올 때 여러차레 구하자 마지못해 빵을 주는 장면이 나오지요 난민의 상황을 봅시다, 초대 받지 않은 자에게 예약이 되어 있지 않는데 불쑥 나타나서 빵과 잠자리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난민과 법 밖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누가 복음에서 밤에 갑자기 초대받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예측없이 등장을 받아들이는 것을 환대라고 합니다, 우리가 초대한 손님이 올때는 미리 예축되고 준비된 일이기에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초대입니다,
그러나 환대는 초대와 다릅니다, 환대는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내 삶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대는 예축이 불가할뿐더러 안정적인 나의 삶에 균열을 냅니다, 심지어 환대는 누가 손님이고 주인인지 그 경계 무너뜨리기고 합니다, 환대는 바로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정의와 환대는 법조문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환대란 이루 말할수 없이 귀찮고 우리 삶의 규칙성과 안정성에 흠집을 내고 그것을 불안정하고 균열을 내는 것입니다,
7번씩 70번 용서하는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불확실성과 불안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루 말할수 없이 귀찮고 우리 삶의 규칙성과 안정성에 흠집을 내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 이것이 바로 바로 환대의 행위인 것 입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는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
그런데 이 환대의 불가능성을 누가 가능케 합니까?
그러므로 환대는 불가능한것이고 사람의 힘으로 할수 있지 않고
이 불가능한 일은 오직 하나님의 메시야 공동체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으로만 할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성령받은 메시야 공동체만 할수 있는 것 입니다
그레서 오직 에클레시아인 성령공동체인 교회만이 메시아적 환대공동체와
정의 공동체가 성령으로 할수 있는 것이 환대일 것입니다,
우리 약대동의 새롬 교회가 이러한 메시아적 환대공동체 성령공동체가 될수 있도록 기도하는 우리가 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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