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앙을 믿는 증인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교회에서는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답변을 보면서 미국에서 '진화론 대 창조론'이 법정에서 맞붙은 사건들, 그리고 인권 위원장과 닮은 꼴인 미국의 한 법조인이 생각이 났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약 100년 전이었던 1925년 '원숭이 재판'으로 불린 '스코프스 재판'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에드워즈 아귈라드재판'입니다 이 재판은 1987년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함께 가르칠 것을 불허합니다. '에드워즈-아귈라드재판'으로 창조론을 가르칠 수 없게 된 창조론자들은 이제는 창조론을 지적 설계로 바꿔 다시 공교육 진입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인 판사인존스 판사는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다"라고판단하며 지적 설계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 합니다.
우리 인류는 이미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며 과학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중세 시대를 겪은 바 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모든 행성이 돈다는 '천동설'을 다시 믿을 순 없습니다.
뉴라이트는 이영훈을 대표 필자로한 ‘반일종족주의’(미래사,2019년)
는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이라는 부제를 달고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했다 뉴라이트와 창조과학의 공통점은. 모두가 엘리트 주의자다 뉴라이트가 역대 대통령 순위에서는 최하위를 겨루는 이승만을 자꾸 띄우려는 의도다. 이승만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학력을
성서는 과학적 입증이 아니라 신앙 고백의 책이다.성서가 기록된 시기는 자연과학이 없던 시절입니다.그러나 현대인은 발전된 자연과학을 공부했기 때문에,성서를 읽을 때 충돌한다.예를 들면, ‘태양이 멈추었다(수10:12-13참고).’라는 기록을 객관적 사실로 볼 것인지,주관적 느낌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가 있습나다.현대인은 해가 뜨지 않고,지구가 자전한다는 객관적 사실을 알고 있다.그러나 성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태양의 멈춤 여부가 아니라,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승리했고 하나님께서 승리할 수 있도록 낮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 주셨다는 체험에 대한 고백이다.따라서,과학적 사실보다 신화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대에 쓰인 성서를 읽을 때,성서의 기자들이 아직 태양이있음을 경험하고‘하나님이 태양을 멈춰 놓으셨구나!’•라고 그들의 신앙 고백적 언어로 쓴 것을 객관적 사실로 투영해서 읽으면 모순이 생긴다
근본주의자가처럼 창조과학자처럼 성서를 읽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서를 창세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왜'인문학적'성서 읽기 인가?물음과 고민을 배제하고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요하는 성서 독법은 독자를 성서의 문자 속에 가두어두는 한계를 지닙니다.이성과 합리를 도구 삼아 성서를 학문의 대상에 국한시키는 독법 역시 성서를 읽는 나와 우리를 소외시키는 한계를 지닙니다.인간의 조건에 대해 탐구하는 인문학적 시각을 통해서 우리는 기존의 성서 독법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통합적으로 성서를 탐구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는 성서에 기록된 인간 삶의 총체성과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조건을 교차시키며 성서를 읽는 새로운 성서 독법입니다.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통해 그대로의 성서 텍스트와 텍스트 너머의 삶의 총체성과 각자의 삶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탐구해 나갑시다
2.신과 인간의 관계:고대 근동 신화에서는 인간이 종종 신들의 노예나 일꾼으로 창조됩니다.
3.신들은 인간을 통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4.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의 결정적인 약점은 안식의 개념의 왜곡 입니다.당시 고대근동의 지배적인 창조신화인‘에누마엘리쉬’에서묘사하고 있는 인간 창조의 목적은 신들의 안식입니다.
5.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인간은 신들의 쉼을 위해 일하는 노동인력,노동하는 존재로서 지어졌고 안식은 신들과 왕과 그의 신하 같은 특수 신분을 위한 날이었다.절대 다수가 그들의 쉼을 위해 일을 하는 날이 안식일 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간 창조와 안식은 근동의 창조 신화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여호와를 쉬게 하기 위한 노동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여호와의 안식을 같이 누리는존재로서 소개됩니다.,그러기에 창세기는7일동안 노동시간을 나누고 하루는 안식하고 자연에서도 안식과 쉽을주는 안식과 쉼과 해방의 존재로서 창조된 천지 창조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선 창세기 1장에서 7번 반복되는 구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3-5)가 뜻하는 바를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주후1~4세기에 번성한 영지주의자들은 플라톤 사상에 심취해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영육 이원론을 신봉했습니다. 그들은 영혼만 고결하고 몸은 불결할 뿐 아니라 자연도 열등한 것으로 보아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아 이러한 영육 이원론은 오늘 자연과 생태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아 무한 착취의 도구로 삼아 오늘 지구촌의 생태계의 위기의 주범이 된 신앙적 기초를 제공한것입니다.
그리고 현대판 영지주의(그로시즘)적 성서 읽기가 바로 창조과학과 같은 성서 문자주의 근본 주의입니다. 영육 이원론과 함께 창조과학과 같은 창조론은 창조냐 과학이냐 라는 이분법으로 성서를 읽고, 문자 근본주의 신앙 영혼 이분법으로 기독교인들이 진보적 과학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하고 , 영혼이라는 좁은 태두리로 우리의 삶과 지성을 절단 위축 축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창조론을 넘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안식과 쉼과 해방의 존재로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 1:28) =부천 새롬 교회 11월 10일 주일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