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로마서의 주제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게된다는 신앙을 오늘 산업물질 문명에서 생태문명의 이행기에 좀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읽어 보려고 합니다.
다 아시는 것 처럼 바울의 이신칭의 신앙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수 없다는 이야기이고 당시 세상을 지배하고있던 제국의 로마법과 유대교의 유대법으로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을수없고,구원을 얻을수없다는 놀라운 혁명적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의 이야기를 4장부터 들고 나옵니다,
아브라암의 믿음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는 이미 나이가 들어 자녀를 생산할수 없는 불임이라 아무것도 잉태할수 없는 나이에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고 믿음의 길을 떠납니다. 그것은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당대 문명국가인 자신의 갈대아 우르를 떠나 사막과 같은 가나안으로 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
지금 코로나 국면처럼 아무런 소망이 보이지 않는 상항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길을 떠난 것입니다.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지쳐 쓰러져 가는 오늘과 같은 재난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도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새로운 길을 출발할수 있는 약속과 믿음이 필요한 것 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사피엔스라는 책을 보면 오늘 호모사피엔스가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를 인지 지식 혁명에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호모사피엔스가 만물의 영장이 될수 있었던 가장 구체적인 능력이 사실이 아닌 허구을 만들고 그 상상력을 믿을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이러한 허구와 상상력을 실지로 믿는 능력으로 인류는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케 하여 만물의 영장이 되었고 제국을 만들었고 눈부신 문명을 만들었고 특별히 문화와 종교라는 가상계를 현실화하는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은 하라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허구가 아니라
바라는것의 실상이요. 보이지않는 것의 증거이니(히11:1)라는 말씀 처럼 실상이요 실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력을 허구가 아니라 실체로 본 이러한 믿음에 대한 막강한 상상력과 믿음을 가진 종교인들과 사제와 왕과 귀족들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자 그들은 타락하여 결국은 백성을 지배하는
제국의 지배자가 되어버리고 그 제국을 확장하는 욕망덩어리들이 되고 맙니다,
그러자 르네상스와 과학혁명이라는 이성과 과학 혁명이 일어나 이러한 제국의 지배층의 무한 욕망과 무한 지배의 상상력중 이성적으로나 과학으로 번역 가능하지 않는 부분은 제한하고 도태 시켜 버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과 과학의 혁명이고 이 혁명은 바로 종교 개혁인 것이다
이성과 과학혁명으로 번역 가능하지 아니한 종교는 바로 미신이 되어 근데 이성과 과학으로 번역가능하지 않는 종교와 교회는 미신으로 도태되어 버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근대 계몽기의 이성과 과학 혁명의 성과인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미신적 종교의 횡포의 오늘 근대에는 이성과 과학의 법과 제도와 여론으로 어느정도 제어가 가능합니다, 지금 근대 이전의 낡은 미신 종교는 개신교 자체의 자정 능력이 없자 시민사회에 의해 제어 당하고 있는 형국인 것 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러한 미신적 종교보다 더 무서운 횡포가 있습니다,이것은 근대 이성과 과학 기술과 법과 제도를 통해서 또다른 물신적 제국을 건설하려는 근대적 산업 문명의 욕망과 횡포들 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닥친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근대 이성과 과학과 기술이 만들어낸 근대 산업문명이 지금 붕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근대 산업 물질 문명은 기계를 돌리는 산업문명을 만들어 산업 노동자을 무한적으로 수탈했을 뿐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지 않는 비산업 직장인들의 감정 정서등도 수탈하여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조울적 불안에 시달리는 피곤 불안사회가 와 있고 지금 그들이 꿈꾸고 있는 것은 사람의 필요 없은 인공지능을 통해 사람의 일자리를 없애고 오로기 기계와 인공지능을 결합한 로봇을 통한 무한한 이윤추구 욕망에 사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산업문명의 기술력과 욕망에 인류가 넋을 놓고 있을 때 그동안 물질산업 문명을 통해 인류보다 더 무자비한 폭행과 수탈을 당한 자연이 견디다 못해 지금 물질 산업 문명을 붕괴 해체시키면서 생태 사회에로의 혁명을 일으킨 일종의 자연 생태계의 혁명이 코로나사건이라는 해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를 통해 바울은 제국을 세운 로마법이나 믿음의 조상들을 만든
유대의 법으로는 우리가 이 약속의 땅을 볼수가 없고 의로움과 구원을 얻을수 없다는 폭탄 선언을 합니다, 그 지금 세상의 로마와 유대법들이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만든 법에 불과 한 것을 간파하면서 이제 우리가 믿는 예수는 바로 이 유대와 로마의 법과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했지만 우리는 그가 부활했다고 믿는 새로운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을 믿으며 로마와 유대교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지금 로마법이나 율법하에서 자신의 기득권이나 소유권이라는 욕망에 취해 있거나 로마가 제공하는 빵과 써커스에 취해 이곳에서 재미와 기쁨을 맛보기 아직 도래하지 않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꿈을 이미 시들해졌거나 잊은지 오랜 사람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깨우로 세로운 세상을 향해 아브라함처럼 길을 떠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일 깨우는 당시 문명 전환기의 신앙 사상이 바로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게된다는 신앙 사상인 것 입니다, ,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는 근대 이성에 의해 종교의 미신적 상상력을 제어할뿐만 아니라
근대 계몽적 이성이 과학기술과 결합한 탐욕적 산업 물질 문명을 탐욕을 바울과 같은
바른 종교적 상상력으로 제한 하면서 생태 문화 사회로 나가야 하고 우리가 이러한 역할을 하려면 인문학적 성서읽기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히브리서에 믿음은 바라는것의 실상이요. 보이지않는것의 증거이니(히11:1) 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 새로운 길을 떠날 때 우리가에게 닥치는 현실이 바로 오늘 우리의 본문 로마서 5장 3-4절 말씀입니다.
3.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새길을 떠나는 사람는 처음부터 약속의 땅을 보거나 새하늘과 새땅을 보거나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습니다, ‘
그들이 처음 경험하는 것은 환난이고 이 환난은 그들에게 인내를 훈련 시키고
그리고 이 인내는 연단을 훈련시키고 마지막으로 이 연단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새로운 소망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교회 전통에서 두가지를 소망을 배울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는 보이는 물질적 건물과 공간이 전부가 아닌 보이지 않는 교회를 보고
그러한 보이지 않는 교회를 향해 끊이 없이 개혁하는 순례을 길을 떠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독일 경건주의의 창설자 필립 스패너 목사와 감리고 창립자 웨슬리등은 구역과 같은 곳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보고 이 교회안의 작은 교회를 통해 성전 뜰만 밟는 교인의 차원을 넘어서 교인들이 영적 돌봄과 선교적 실천을 하는 영적제사장들이 되어 교회개혁의 누룩을 감당하는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이제 본격적인 인문학적 성서읽기와 인문학적 예배를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이제 우리는 우리안에 제도와 건물 넘어의 보이지 않는 교회를 보고 그러한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교회안의 작은교회가 되는 소그룹으로 교인들이 영적 돌봄과 선교적 실천을 하는 영적 제사장들의 역할을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처럼 오늘 이 시대에 종교가 다시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생태문명의 길을 열심히 찾으며 또한 교회안의 작은 충성된 교회를 다시 발견하는 믿음으로 아직 도래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믿고 꿈꾸며 그것에 충성을 다하는 믿음으로 의롭게되는 우리 새롬 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