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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교회운동을 통한 생명운동으로의 전환 ; 황인성 목사 박사학위 논문 중 일부 .

신나는 미션

by 아름다운 마을 2020. 10. 8.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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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가교마 (가정 교회 마을 연구소) 모임때에는 거실 구석에서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부천, 양평, 아산, 런던, 프라하, 알마티, 상파울로, 토론토, 코타키나발루, 서울, 아르헨티나, 홍천 등지에서 모인 분들과 교제하고 특별히 이번에 장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황인성 박사의 = 산업화 시대와 한국교회의 선교적 응답: -도시산업선교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연구- =학위논문 발표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새롭고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황박사님 허락을 받아서 어제 모임 동영상과 논문을 함께 올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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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대와 한국교회의 선교적 응답: 

-도시산업선교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연구-

 ==   황인성 목사 박사학위 논문  중 일부  ====.       

 

https://youtu.be/k9Qh4n3u8O0

 3. 도시산업선교 운동의 전환기: 민중교회운동을 통한  생명운동으로의  전환


황홍렬은 도시산업선교 운동의 연장선으로 민중교회의 출현에 주목했다. 

민중교회란 민중신학을 바탕으로 민주화, 민족통일, 교회 갱신을 위해 민중을 중
심으로 하는 교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1983년을 시작으로 1987
년 6월 항쟁 이후 급격히 변화된 민주사회의 초기시절을 정점으로 본다. 황홍렬
은 이 시기를 1983년~1987년의 민중교회 형성기, 1988년~1992년의 민중교회 
발전기 그리고 1992년~1997년의 민중교회 변형기로 세분화 하였다.646)
1979년 10월 박정희 피살 이후 국민들은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
상했으나 그해 12월 또다시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은 이에 대한 
반대 저항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은 반민주화체
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유신 정권의 극심한 도시농촌선교 운
동 탄압으로 인하여 민중운동은 조직적으로 그 힘이 약해져 있었다. 유신 정권이 
후 또 다른 군부 정권에 대항해야 하는 외부적 도전과 군사정권에 유착되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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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4) 유미호, “한국 기독교환경운동과 인명진,” 영등포산업선교회, 『인명진을 
말한다』(서울: 2016, 동연), 173-174.
645) 위의 책, 177-183. 영등포산업선교회의 경우 1977년 ‘영등포노동교회’가 
시작되기도 하였으나 이를 기반으로 1983년 성문밖교회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안하원, “한국 민중교회와 인명진,” 영등포산업선교회, 『인명진을 말한다』(서
울: 2016, 동연), 302-303.
646) 황홍렬, 『한국 민중교회 선교역사(1983-1997)와 민중 선교론』, 74. - 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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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해 가는 교회들과의 갈등이라는 내부적 도전을 동시에 극복해야 하는 질문이 
생겨났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의 흐름 속에서 민중교회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기존의 도시농촌선교 운동은 현장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들과 함께 하는 운동성
에 더 관심이 있었다면 민중교회는 다시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운동으로의 회
귀라고 볼 수 있겠다. 영등포산업선교회가 1983년 1월 ‘성문밖교회’를 시작한 이유도

 동일한  맥락이었다. 정부의 탄압과 언론의 공격으로 소그룹 중심의 산업선교회 운동이 
거의 와해 되었고 조직적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교회는 선교회와는 
달리 정부가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교회 내부적으로도 선교회는 노회
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나 교회는 자율권이 더 보장된다는 특징이 있었다. 또
한, 교회 프로그램을 통하여 산업선교회가 전개해 왔던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으
며, 헌금을 통한 재정자립의 가능성도 열려 있었던 것이다.647)
민중교회는 주로 예장, 기장, 감리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83년 예
장 통합 목회자들은 민중교회 목회자들을 훈련 시키기 시작했다. 훈련을 받은 목
회자들의 최우선 과제는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648) 예장의 
경우 1985년 예장노동선교협의회를 시작으로 다양한 연합체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다가 1991년 예장민중교회목회자연합으로 통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
에는 농민목회자들도 함께 연대하였으나 1991년 이후 분리되었다. 감리교의 경
우 1992년 1월에 감리교 민중교회운동협의회가 설립되었고 기장의 경우 기장의 
경우 1985년 한국민중선교협의회를 조직하여 이듬해 기장 민중교회운동협의회
로 개칭하였다.649) 각 교단 뿐만 아니라 민중교회혹회자들이 함께 모여 협의회
를 구성하였는데 1988년 7월 11일 43명의 민중교회 목회자가 성문밖교회에 모
여서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한민연)을 창립하였다.650)
그러나 한민연은 민중교회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화 되어있고 기존의 선
교운동에 익숙해져 버린 ‘잘못된 관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교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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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 인명진, 『성문밖 사람들 이야기』(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145-16
7. 648) 위의 책, 90-91.  649) 황홍렬, 『한국 민중교회 선교역사(1983-1997)와 

민중 선교론』, 145-15
2.  650) 위의 책,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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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의 부재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지역 
민중교회연압과 교단민중교회운동의 갈등이 고조되기도 하였다고 본다.651)
황홍렬은 민중교회에 대해 평가하면서 교단마다 강조점이 상이하나 기본
적으로 도시농촌선교 운동의 유산을 이어가기 위한 운동이었다고 본다.652) 그리
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중의 요구에 대해 고민하면서 다양화되어가는 민중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중교회 또한 다양한 사역으로 분화되어 간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선교, 노숙인 선교, 장애인 선교, 그룹 홈을 통한 선교, 마
을 목회, 농촌을 기반으로 한 생명선교 등 다양한 목회형태로 발전했다고 본
다.653) 그는 또한 ‘선교적 교회’ 운동은 문화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결국 그리스
도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민중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통전적 접근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민중교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며 카리스마적 목회 리더십에 의존하는 의사소통의 한계를 보였다
고 비판한다.654)
민중교회 스스로가 한계점을 느끼면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하
였는데 그중 한 주제가 바로 ‘생명’이었다. 환경운동, 도농 간의 협력 등을 통하
여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넓혀갔다. 김지하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할 경우 자기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인식론적 이분법’과 ‘소유욕’의 악마적 성향을 넘어서 자기 비움의 신학으로 발
전해야 함을 주장한다.655)
 B. 지역교회운동과 연계된 도시산업선교의 운동성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1960~1970년대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도
시농촌선교는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민중교회운동을 통한 조직적 변화를 시도
하기도 하였다. 그 짧은 과도기의 시간을 거친 후 다양화 시대에 맞추어 도시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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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위의 책, 158-166. 652) 위의 책, 88-92. 
653) 황홍렬, “선교적 교회론에서 본 한국 민중교회,” 『선교적 교회론과 한국교
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439-440.
654) 위의 책, 443-445.
655) 김지하, 『밥:김지하 이야기모음』(서울: 분도출판사, 1984), 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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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선교 또한 다양한 사역의 형태로 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중 마을 목회 운
동은 도시농촌선교가 강조해 오던 중요한 선교 신학적 논점을 가지고 오면서 21
세기의 상황에 맞추어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 목회의 시작점을 어떤 

특정한 날짜로 특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마을공동체운동을 ‘지역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가려는 자발적인 공동체운동’이라고 보았을 때, 이러한 자주적 운
동은 이미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용훈은 마을공동체
운동의 원형적 모습의 예로 유재기와 배민수를 중심으로한 ‘예수촌운동’, 김용기
의 ‘가나안복민운동’, 1960년대 장기려를 중심으로 한 ‘청십자의료조합’, 1970년
대 활빈교회와 두레공동체를 언급한다.656) 그는 마을공동체 운동의 핵심가치로
서 공동체성, 지역성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도시화, 산업화의 과정
을 거치면서 도시지역은 비인간화와 경쟁사회 속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하였고 농
촌 또한 이농 현상으로 인하여 관계중심의 마을문화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공동
체성의 상실 속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소속감과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공동체 운동은 바로 이러한 현대인의 고독에 주목한 것이다.657) 또한, 지역
과 마을의 성장 없이는 교회의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인식을 통하여서 대
형화되고 탈지역화 되는 교회성장중심주의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658)
그리고 이러한 마을공동체운동은 단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대에게 전수 
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마을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환경과 자연의 적절한 사용 속에서 통제된 경제성장을 내포하고 있
기도 하다.659) 정재영, 조성돈은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이후 실질적인 민
지주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시민사회 차원의 접근이 교회에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역할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평신도 중심의 기독교 운동이 강조될 수 
밖에 없음을 주장한다.660)

도시농촌선교에서부터 민중교회를 거쳐 생명을 지향하는 마을목회로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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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 조용훈, 『마을공동체와 교회공동체』(서울: 동연, 2018), 33-34. 
657) 위의 책, 46-48. 658) 이원돈,『마을이 꿈을 꾸면 도시가 춤을 춘다』

(서울: 동연, 2011), 85-8
6. 659) 조용훈, 『마을공동체와 교회공동체』, 51-53. 
660) 정재영·조성돈, 『더불어사는 지역공동체 세우기』(서울: 예영, 2010),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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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과정을 겪었던 대표적인 사례가 부천의 새롬교회이다. 이원돈 목사는 KSCF
에서 활동하다가 1986년 부천새롬교회를 개척하면서 전형적인 도시빈민선교운
동을 시작했다. 취약계층 어린이들을 위한 공부방과 작은 도서관을 시작하게 되
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순히 민중의 가난을 해결하는 것만이 
교회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없고,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 살아나야 마을
에 속한 교회도 살아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IMF를 지나면서 마을 속 
가정들의 해체 위기의 상황을 보며, 새롬가정지원센터를 통해 무료급식소, 청소
년 쉼터, 은빛도시락배달 서비스를 통한 노인사역 등의 가정사역에 집중하게 된
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이제 이러한 사람에 관한 관심은 생명의 영역으로 확
대되어 환경위기와 다문화사회에 어떻게 마을이 역할을 하며 더 나아가 세계적
인 연대를 만들어내는가의 질문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이것을 ‘생명망(The Web of Life)목회’라고 규정하였다.661)
한국일은 부천새롬교회를 평가하면서 제일 먼저 목회자의 교회론과 리더
십을 강조하였다. 교회가 교회 내부에만 머물지 않고 철저하게 마을과 함께 한다
는 이원돈 목사의 교회론이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목회자 혼자가 아닌 마을 주
민이 수평적으로 함께 이 운동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고 보
았다. 부천새롬교회가 하는 모든 사역은 궁극적으로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662)
도시산업선교가 가지고 있는 선교학적 원리들이 이어저 오고 있음을 볼 수 있으
며 이에 더하여 기존의 도시산업선교가 접근하지 못했던 생명목회로 발전한 형
태라고 볼 수 있다. 농촌 운동에 있어서도 1980년대 농민들의 권익을 위한 

농민운동에서 ‘정
농회’를 비롯한 생명 운동으로의 전환기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의 
과정을 아산 송악교회가 잘 보여주고 있다.663) 한국일은 송악교회에 대해 지역
에서 생명 목회를 실현하는 교회라고 특징 짓고 있다. 송악교회는 농촌의 자연환
경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녹색 영성을 
661) 이원돈, 『마을이 꿈을 꾸면 도시가 춤을 춘다』(서울: 동연, 2011), 281-
283. 662) 한국일, “선교적 교회의 실천적 모델과 원리,” 『선교적교회론과 한국교
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350-351. 
663) 한경호, 『생명의 영성이 약동하는 농촌목회이야기』(서울: 미션아카데미, 2008), 

3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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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친환경 유기농업의 장려를 통하여 교회뿐만 아니
라 마을 전체가 대안 농업지역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이를 통하여 폐교 
직전의 초등학교가 환경교육 시범학교로 변하였고 교회가 점차 마을의 중심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사회를 섬기고 있다고 본 것이다.664)
한국일은 송악교회를 평가하면서 생명목회를 중심으로 교회 내부 사역이 
아닌 송악면이라는 지역 활성화를 위해 헌신하는 교회에 주목하였다. 폐교 위기
에 처한 거산초등학교 내에 친환경 급식, 생명교육 등을 통하여 특색있고 매력있
는 학교로 전환하였다. 또한, 풍물패 등과 같은 지역 내 친환경 농사와 관련된 
행사를 조직하면서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냈다.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노인
회관을 지역아동센터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또한, 송악교회는 ‘교회의 재직을 지
역사회의 리더’로 키운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665) ‘Misio Dei ’ 관점에 입각
하여 세상 속의 교회에서 평신도 중심의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부천 새롬교회와 동일하여 생명운동의 맥락에서 진행하고 있다. 

서울 도시 지역에서 지역사회와 긴밀하게 소통하는 성암교회는 지역의 
필요를 분석하기 위한 노력이 눈에 띈다. 지역을 섬기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
회의 일방적인 시혜성 사역이 아닌 실제 지역 주민이 원하는 욕구를 조사하고자 
전물 컨설팅 기관에 의뢰하여 1년여간 지역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지역연구
를 통하여 성암교회 교육관 건물을 ‘바오밥나무 카페’와 ‘다섯콩 작은 도서관’으
로 전환하였다. 아파트 중심이 아닌 빌라가 밀집된 지역에서 아이 엄마들이 아이
들을 안전하게 돌보며 엄마들끼리의 정보 교환과 교제를 이어갈 장소를 제공한 
것이다. 도서관 또한 아이들을 위한 장소로 활용된다. 운영 원칙에 있어서도 교
회가 우선이 아니라 교회도 지역사회의 한 일원으로 참여하여 동등한 원칙에 입
각하여 장소를 사용할 수 있다.666)
세월호 사건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안산명성교회는 지역사회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섬김의 사역에 주목한다. 이 교회에 속한 6명의 학생들도 세월호 
희생자 중 일부였다. 이 교회는 유가족들을 위한 전문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
664) 한국일, “선교적 교회의 실천적 모델과 원리,” 『선교적교회론과 한국교
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352-354. 
665) 위의 책, 352-353.
666) 한국일, 『선교적 교회의 이론과 실제』(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
16),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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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4 -
다. 필요한 상담장비와 전문인력을 대학교 연구소와 연계하여 지속적인 상담치료
를 병행하고 있다. 또한, 유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기금도 
마련하여 돕고 있다. 단순히 세월호 사건으로 인하여 이 교회가 지역사회를 섬긴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협동조합과 복지관 운영 그리고 지역 리더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한 사화적 자본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위기
적 상황이 왔을 때 교회가 중심이 되어 교회가 속한 마을을 헌신적으로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667)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산업선교 운동과 농촌선교 모두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
이다. 한국일은 한국의 마을 목회에 대해 평가하면서 서구의 선교적 교회론에 대
한 특징들을 몇 가지로 묘사하는데 그 특징들이 본 논고에서 주장하는 도시산업
선교의 선교학적 함의와 유사성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한국일은 서구교회에 
있어서 선교적 교회론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지역성의 재발견이라고 보
았다. 기존 크리스텐돔 체제에서는 선교는 해외에서 행해지는 그리고 공교회 중 
선교회가 감당하는 특수한 사역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서구사회 자
체가 선교지가 되어감에 따라 바로 지역교회의 회복이 선교라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둘째로 교회중심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로의 전환이
다. 교회 활동의 중심주제가 교회 내부의 역량 강화나 내부활동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목적으로 교회를 포함한 온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다. 마지막으로 평신도는 선교를 위해 후원하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선교적 교회
론을 통하여 단순한 후원자가 아닌 지역 내 선교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적
극적으로 일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식이 변화되었다고 본 것이다.668)
한국일은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론, 선교론, 세계
관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다. 그는 먼저 한국에 기독교가 소개된 시점이 일제 
강점기와 제국주의 시대 속에서 어려움과 핍박의 시대를 겪었던 때라고 말한다. 

그 당시 기독교는 현 세상에 대한 탈피와 내세적 삶을 강조하는 이원론적 구원
론이 강조될 수 밖에 없었고 이와 연관하여 교회론 또한 교회는 ‘구원의 방주’라
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한국에는 기존의 토착
667) 김도일, 『가정·교회·마을 교육공동체』(서울: 동연, 2018), 399-407.
668) 위의 책, 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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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개종은 곧 기존 종교와 전통을 떠나
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경쟁의 관계 속에서 기독교는 이분화되고 공격적 성
향이 강화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 교회론은 결국 선교론과 교회조직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교회 중심의 생활은 당연히 목회자에게 더 많은 결정권과 권력을 
주었고 선교의 흐름 또한 세상의 회복보다는 모교회와 동일한 형태의 새로운 교
회 개척을 의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669)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한국 도시산업
선교 운동이 한국교회에 주는 선교적 함의는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필자도 

한국교회의 청년 이탈 현상을 분석하면서 지금의 한국교회가 갖
는 내부적 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다.670) 청년들의 기독교 인구감소에 대하여 교
회의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구분하여 원인을 분석하였는데, 이 중 내부
적 원인에 대하여 첫째로, ‘목회자 중심주의’, 둘째로, ‘외적 성장 중심의 교회론’, 
셋째로, ‘소통의 부재’를 주장한다. 목회자 중심의 교회론은 결국 교회구조와 직
제를 목회자 권위 강황에 이용되었다고 보았으며, 기업의 대형화처럼 외적 성장
을 추구한 나머지 이원론적 세계관과 교회 내부적 조직 강화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들이 종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질문과 의심들에 대하여 교회가 개방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가 부재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프로그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671)
지금 한국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위기에 대하여 지역교회 운동으로 강조
하는 논점은 사실 서구의 선교적 교회론에서 유입된 새로운 신학이 아니다.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내 도시산업선교 운동에서 경험하고 강조해 온 한
국적 상황화 신학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중심의 교회론에서 세상을 향한 
‘Misio Dei ’로서의 선교를 강조한 점이 그렇다. 또한, 상호문화해석학적 관점에
서 미국의 GOCN이 ‘Misio Dei ’의 북미적 문화상황 속에서의 표현으로 본 것
처럼 한국적 상황 내에서 한국의 문화와 상황을 전제로 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도시산업선교 운동은 단순히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상황의 변화와 수
용이 아닌 상황이 텍스트를 재해석하게 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까지 확대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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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 위의 책, 50-60.
670) 황인성, “한국 청년교회 대안공동체 만들기: 높은뜻 광서교회 청년부를 중
심으로,” (미간행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2015).
671) 위의 책, 7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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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알린스키와 프레이리의 방법론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역 내에
서 영향력 있는 운동을 전개해 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역 신학을 이야기하였고 
이 운동의 주체가 목회자가 아닌 현장에서 수많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평신
도 중심의 운동을 강조한 것이다.672)

 

Ⅷ. 결론
A. 요약
한국교회는 산업화를 먼저 경험했던 서구교회의 반응과 신학적 반성 속
에서 뒤늦게 그러나 급격하게 산업화, 도시화를 경험하는 비서구권 교회가 맞는 
도전과 혼란은 서구교회가 부딪힌 현실보다 더 혹독한 상황이었다. 한국은 이러
한 산업화, 도시화와 더불어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현상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
했던 군부정권의 비민주적 탄압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결합한 더 복잡한 형태였
다. 이에 대하여 도시산업선교 목회자들은 처음에는 전통적인 교회의 관점에
서 노동자 전도를 위한 활동으로 현장에 투입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처절한 
노동자의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단순한 교회의 외적 성장이 목표가 아닌 하나
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그들의 교회론이 넓혀지게 되었다.

 단순히 이론교육에 머무르지 않고 현장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교회 밖에서도 역
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고 목회자가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이 아닌 소
그룹의 인도자로서 문제를 겪고 있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해 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발적 조직은 힘을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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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어 불의를 자행하는 기업이나 정부에 대항하는 민중 권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민중의 힘을 두려워한 기득권층의 핍박과 탄압은 필연적 결과였다. 실무
자들을 구속하거나 노동운동, 농민운동에 가담한 자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등
의 정책을 일관하였다. 언론을 통한 용공 단체 프레임 논쟁도 지속 되었다. 이러
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은 기독교의 정체성 잃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비인간화되고 힘과 맘몬에 의해 억눌리는 현실에 대
해 복음의 정신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이었다. 한국 도시산업선교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선교학적 가치를 담고 있다. 1
9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세계 선교 신학에서 논의되었던 ‘Misio Dei ’ 는 어
떻게 한국에 수용되었고 또 구체화하여 발전하였는가의 질문에 한국 도시산업선
교 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운동의 실무자들과 학자들이 실제 1968년 웁살라 
총회에 참석하였고 돌아온 직후 같은 주제를 놓고 고민하면서 한국적 상황에 따
른 비평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한국은 특별히 아시아 신학의 특징 중에서도 ‘민
주화’의 주제가 큰 도전이었다. 따라서 그 당시 ‘Misio Dei ’ 나 상황신학의 성
격은 정치적 상황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평적 고찰이 반영되어 있다. ‘민중신학’ 

은 대표적인 도시산업선교 운동의 신학적 근거이다. 단순히 서구의 기독교 전통
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민중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복
음을 재해석하려는 시도였다. 그 당시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이 방법론적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
론은 사울 알린스키(Saul Alinsky)의 주민조직론(Community Organization)과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의식화 교육론이었다. 이 두 이론 모두 억압하
는 지배계층에 대한 저항운동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조직운동가 혹은 교사는 
이 운동의 리더가 아닌 문제를 겪고 있는 자신들이 스스로 상황을 인식하고 조
직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돕는 코치(coach) 혹은 조력자(faciltator)의 역할에 
있었다. 이는 목회자 중심적이고 권위적이고 계층적인 전통 한국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였다. 노동자, 농민 스스로가 중심이 되어 그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노동조합이나 다양한 소그룹 모임을 통하여 운동을 확장해가는 평신도 
운동이 처음 시도되었고 실제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물론 방법론적인 전제가 계급 간의 투쟁이나 억압을 담보로 하는 시대적 한계성- 218 -
을 지니고 있지만, 이 두 이론이 갖는 수평성과 상호배움의 원리는 21세기를 사
는 우리에게도, 특별히 새로운 대안을 고민하는 한국교회가 돌아봐야 할 훌륭한 
도시산업선교 운동의 유산이라고 할 것이다. 도시산업선교 운동은 초기부터 

초교파적인 모임으로 진행되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물론 한국교회 자체가 교단별로 자리 잡고 있고 1950년-1960년
대에 장로교는 예장과 기장, 그리고 또다시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는 역사가 있
지만, 도시산업선교 운동에서는 가톨릭을 포함한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의 실무자
들이 함께 정기적으로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실무자와 학생 교육에서는 하나의 
교육기관을 통하여 같은 관점을 가지고 일하는 에큐메니칼적 협력이 일어났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 교단, 해외기관과의 협력은 더욱 눈여겨볼 만
하다. 처음 한국에서 도시산업선교 운동이 시작될 때에도 미국연합장로교회의 물
질적, 인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WCC에서도 CWME 내 조직을 통하여 전 
세계, 특별히 아시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으며 WCC와는 독립적인 그러
나 상호협력의 관계 속에서 시작된 CCA 또한 자체적인 도시산업선교 기구를 통
하여 아시아 교회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협력의 매개체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이
러한 세계 선교 신학, 아시아 선교 신학 그리고 한국의 선교 신학이 도시산업선
교 운동을 통하여 긴밀하게 소통하고 실제로 실무자들과 학자들이 상호교류하면
서 각자의 신학적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다양한 문서들과 선언문을 통
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군부정권의 수출주도정책은 농촌 지역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농 촌 지역은 농업 기반을 잃었을 뿐 아니라 젊은 세대 인구이동으로 인하여 

가족 과 마을 자체가 피폐화되는 좌절감을 겪게 되었다. 산업화 지역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정의와 경제정의가 문제가 되었다면 농촌 지역에서는 저가곡물제 등
의 정부 규제로 인한 또 다른 경제 부정의를 경험한 것이다. 한국 도시농촌선교 
운동은 도시산업선교와 마찬가지로 농민의 권익을 위해 현실을 인식하고 모임을 
조직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단순한 경제정의에만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생태 정의로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즉 농촌운동은 농민운동이라는 인본주의적 접
근에서 생명을 살리는 생태 운동으로 확장되어 발전된 것이다. 군부 독재정권 

아래에서 노동자, 농민의 인권을 지키고, 공업이 아닌 농- 219 -
업과 생명 운동을 전개하는 도시농촌선교 운동은 당연히 정부의 규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도시농촌선교 운동은 한국민주화운동의 
초석을 놓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조합은 이후 어용 노
조와 거리를 두며 민주화 운동의 주요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농민운동 또한, 수입 
개방화와 정부의 부정의한 정책에 대한 투쟁 등의 정치적 이슈와 맞물려 있었다. 

국가조찬기도회나 경영주, 정치인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으로 있던 기존 대형교회
들과의 마찰도 피할 수 없었다. 이후 노동조합과 농민조직은 기독교를 넘어 전국
적 조직으로 확대되었으나 분명 그 운동의 시작점은 도시농촌선교 운동에서 기
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은 1980년대 말 민주

화 과정이 진행되면
서 점차 약화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군부정권의 맹렬한 탄압으로 인해 교단의 
보호를 받은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제외하고는 이미 조직 대부분이 해체되었다. 또
한, 치열한 억압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방법론을 발전시켜왔던 도시
산업선교 운동이 변해버린 사회 구조에 잘 대응하지 못한 점도 있다. 운동의 전
제가 언제나 억압하는 지배계층과의 갈등 속에서의 투쟁이었으나 이제 20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다양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80년대에 들어서 민중
신학의 경우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데올로기화된 경향
을 보였다. 이러한 외연과 방법론들은 빠르게 변화되고 있는 사회 구조와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 약점을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시대
적 현실을 인식하고 철저하게 고민하였으며 이를 신학화하고 이론에만 머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론을 통하여 복음을 성육화를 시도하였다는 점
은 지금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별히 운동을 조직하는 방식에 있어
서 목회자 중심이 아닌 평신도 중심의 소그룹 운동은 지금의 상황 속에서 절실
히 필요한 행동 원리이다.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출발한 

정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제 경제정의, 생태 정의의 문제는 ‘생명’ 그리고 

‘평화’로 수렴되고 있 다. 지난 시간 동안에는 도시선교와 농촌선교가 독립적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문제를 해결해 왔다면 이제는 ‘생명’과 ‘평화’의 주제 아래 

통전적으로 접근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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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들이 생겨나고 있다. 민주화, 자본주의, 세계화 등의 거대 담론을 포함하는 ‘신
자유주의’라는 거대 도전 앞에 그리고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속에서 한국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상황을 인식하고 운동을 이어갈지에 대
한 단서를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을 통해 안내를 받을 수 있겠다. 
 B. 제언
본 논고는 195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한국의 산업화, 도시화의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도시산업선교 운동의 발전과정과 그 선교학적 의의를 재
고해보고자 하였다.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을 연구하기 위해서 먼저 산업화를 
경험하였던 서구사회의 반응과 이에 따른 연속적 회의들을 살펴봐야 했으며 이
와 동시에 아시아 교회에서는 어떻게 산업화, 도시화의 도전에 대응했는가를 배
경으로 살펴보았다. 이후 1960년대에서 1980년대 한국의 상황에 대하여 배경을 

살펴본 후  실제로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조명해 보았다. 

그러나  본 논문은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의 흐름 중 선교학적 의의가 있는 

연관성에 
대한 부분을 확대해서 보았기 때문에 그 역사적 서술에서는 축약되거나 생략된 
부분들이 있다. 역사적 정당성과 자료들은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혹은 민주화 운
동의 관점에서 취합된 다양한 1차 자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본 논고는 산업화 지역 중심의 운동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도시빈민운동과 농촌
운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할 수 없었다. 한국 도시산업선교
 운동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선교학적 개념을 도출해
보고자 했다. ‘Misio Dei’와 ‘상호문화해석학적 관점’, ‘평신도 신학’, ‘생명신학’ 을 

준거의 틀로 잡고 도시산업선교 운동을 선교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보고자 
하였다. 본 논문은 사실 지금 한국교회의 위기 속에서 고민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다양한 대안적 목회에 대한 근거를 갖기 위한 밑작업이다. 즉 지금의 상황은 도
시산업선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2차 산업혁명의 시기를 훨씬 지나 3차 
산업혁명을 막 지나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이미 진입하였다. 또한, 최근 발생
한 코로나19 사태를 통하여 지구화, 세계화의 민낯을 경험하며 4차 산업혁명과
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도시산업선교 운동 연구

가 과연 지금 한국교회에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계속 남게 
된다. 이미 본 논고에서 밝혔듯이 도시산업선교 운동이 남겨준 선교학적 유산은 
지금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지역 교회운동의 역
사적 유산이 되는 것이다. 서구의 선교적 교회론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짧은 시간 
안에 무리하게 적용하는 유행과 같은 선교운동이 아닌 이미 반세기 그 이전부터 
한국의 상황에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며 진지하게 신학적 질문을 현장에서 던
진 첫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산업선교가 강조한 ‘하나님의 선교’, ‘현장
성’, ‘상황화’, ‘평신도’, ‘수평 의사소통’, ‘국제협력’ 등과 같은 중요한 가치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한국교회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적용해야 할 중요한 선교 신학
적 가치를 담고 있다. 따라서 본 논고는 한국의 지역 교회운동의 연속성과 

그 기원을 찾는 첫 
작업을 했을 뿐이다. 앞으로 이 연구를 토대로 지금의 지역 교회운동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비교 연구하여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또한, 결국 ‘생명’으로 수렴되는 도시선교운동과 농촌선교운동의 통전적 접
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필연적 결과에 이르렀다. 한 예로 수유리와 
홍천에 공동체로 도농 협력의 대안을 마련하고자 이미 오래전부터 살아오고 있
는 ‘아름다운 마을공동체’ 등과 같은 통전적 선교운동에 관한 연구와 그에 따른 
실제적 목회들이 생겨나고 지속발전되어야 할 것이다.673)

 



황인성 목사 박사학위 논문 파일 

5_632759781908335843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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