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분노의 이유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하고 10년 정도 지난 기간에 갈라디아 교회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순례전도자들이 왔는데 그들이 전한 복음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전혀 다른 가짜 복음인데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그 가짜 복음을 받아들이고 너무도 쉽게 이러한 낡은 가짜 복음으로 후퇴하고 돌아서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으로 부터온 가짜 사도들이 갈라디아에 전한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이 이미 철폐한 율법을 다시 주장하고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거의 유대교로 다시 후퇴한 낡은 종교를 의미합니다,
지금 바울이 없는 사이 갈라디아 교회는 이러한 낡은 유대교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바울의 복음은 낡은 유대교의 할례와 율법을 폐기한 완전히 개혁적이고 새로운 복음이었는데
이 거짓사도들의 주장은 다시 유대교의 할례와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가 브로커와 가짜와 사기를 구분하는 법은 간단합니다,
이 가짜와 부로커들은 무엇인가 지켜야할 옵션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종교란 무엇이든 계율 율법등 지킬 것을 많이 주고, 무엇인가 하지 말아야 할것이
잔뜻 많아야 그것이 참된 종교인줄 압니다,
예수님 당시 지역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종교인들인데
이들을 남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를 많이하고 안식일에 지켜야할 율법을 잔뜩 만들어
이러한 종교적 외식으로 자신의 어필하려고 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가장 많은 갈등을 일으킨 바리새 주의의 외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한 종교은 이러한 낡은 율법들과 종교적 외식을 철폐한 종교입니다,
구약에서 출애굽을 통해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시 애굽으로 다시
고기가마로 돌아가자고 반란을 일으켰듯이 그들은 늘 무엇인가 우상이 필요합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거기에는 벌써 이미 이러한 사람의 심령속의 허전함이 묻어나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이 바치는 제물을 받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그들은절규합니다.“주님,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만족하시겠습니까?”
1. 흔히 우리들은 예배, 헌물과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절기마다 살진 짐승을 바치는 제사에 열심을 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작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1:11-15).
2. 금식도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아 금식을 했습니다. 그 그 모습을 본 이사야 예언자는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와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고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사58:3-7)이합니다,
성서에서 좋은 신앙생활이란 교회 빠지지 않고 예배 잘 드리고 헌금 꼬박꼬박 드리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지내는것 이것 이상으로 예언자 미가는 “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절)
최근 김진호 목사의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새로운 우파의 탄생』이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책은 이명박 정권 시절 부자되세요 함께 한국교회에 새롭게 등장한 웰빙신앙에 대해 다룬책입니다, 후발대형교회는 선발대형교회가 전도를 통해 교회를 부흥시켰다면 전도가 아니라 수평이동을 통해 교회를 성장시켰는데 기존교인들이 강남지역으로 수평이동한 이유가 바로 웰빙신앙때문이라는 것 이고 이 웰빙신앙을 비판한 책입니다. 선발 대형교회의 신앙의 핵심이 "예수 천당"이었다면 후발 대형교회의 웰빙 신앙의 핵심이 바로 "예수 행복"이었다는 것 입니다. 후발 대형교회의 예수 행복의 웰빙신앙이 바로 한국 교회 교인들을 강남일대의 대형 교회로 수평이동 시켰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웰빙신앙처럼 신앙의 중심이 개인의 행복이되어 행복이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서기 시작하면 가장 먼져 이웃이 멀어지고 그다음 십자가가가 멀어집니다, 자신보다 못한 이웃 가난한사람들을 멀리하고 가까이 오지 못하게하는 배제 차별하고 부자들끼리 출세한 사람하고만 어울리고 싶어하고 그래서 그들만의 성에 같힌 대형교회가 되기 시작하고 교회를 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해 나가는 선교에 대해 자꾸 시비하고 문제제기 하기 시작하였던 것 입니다,
바울이 바로 갈라디아서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순회전도자를 만나서 당한일이 이 일입니다, 그들은 유대인 이외에 다른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고 오직 할례받은자와 율법을 지키는 자와만 어울리라고 요구하면서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대해 강한 도전을 하여 지금 바울이 대노하는 하는 것입니다,
진에드워드라는 분이 쓴 실라의 일기와 디도의 일기라는 책을 보면 그 첫장면에 당시 예루살렘의 지도부의 바울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적나라하게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듣자하니 바울이 안디옥을 떠나 두 번째 원정에 나섰다고 합디다, 또다시 선성한 율럽을 깨뜨리며 이방 세계를 휘젓고 다니겠다는 수작이죠” 그리고 베드로는 어찌할꺼요, ,그 자도 바울에게 홀려서 제정신을 잃어서 이방인들에게 메시아를 전했답니다, 베드로와 바울 이 두 사람이 우리 전통을 무너뜨리고 있어요. 우리는 바울이 또 어디로 가든 끝까지 따라다니며 무슨 수를 쓰던지 그자가 더 이상 헛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에는 바울이 이방땅에서의 승리에 대해 시기와 질투를 할뿐만 아니라 이 바울의 이방행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터트리면서 이 이방 행보를 저지하려는 아주 강대한 전선이 구축되어 있는 것에 대해 지금 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대노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일이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났는데 다시말해 1990년대 부터 2000년대 예수 천당에서 예수믿고 부자되고 행복하자는 웰빙 신앙으로 대대적 신앙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여기에서 그들만의 성에 갇힌 대형교회가 되기 시작하고 이웃을 향해 나가는 선교에 대해 자꾸 시비하고 문제제기 하기 시작하고 교회밖 이방인에 대한 선교를 경계 하기 시작하고 축소하면서 결국에는이것이 차별 배제 혐오라는 한국 기독교 우파의 핵심가치가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촛불에 대항하는 우파의 태극기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추구는 당연한 인간의 욕망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인 문제가 되나요.?
기독교 윤리적으로 행복은 우리가 성서가 이야기하는 이웃사랑과 정의 평화와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람을 이야기 할 때 은혜로 주어 지는 것이 되어야지 나의 행복이 중심이되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될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을 우리 삶의 가장 중심에 놓고 우리가 웰빙 신앙을 추구하면 정말 행복할까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중심에 놓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하면 우리의 인생은 오히려 자신과 주변에 갇히고 오그라들고 위축되고 축소 되면서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을 외면하고 자신의 가족만 추구하고 행복만 추구하는 삶과 그들의 가족을 보면 오히려 결코 정신적으로 가족적으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적으로 행복은 우리가 성서가 이야기하는 이웃사랑과 정의 평화와 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람을 이야기 할 때 은혜로 주어 지는 것이 되어야지 나의 행복이 중심이되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될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전한 복음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에 있었던 약대동 여름 마을 학교 교사대학에서 이승훈 목사님이
이번 여름 꼽사리 영화제가 300만원의 예산으로 치루어진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코로나로 한국교회의 헌금이 2년안에 3분의 일이 줄고 교회도 경제적 큰위기가 올터인데 이제 앞으로 교회가 그러한 것을 제공해 줄수 없을 때 과연 우리가 그러한 곳에서 과연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코로나 이후 편안한 의자가 없어도, 화려한 찬양이 없어도 멋진 교회 건물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사람들만 남게 될것 이라고 생각 합니다.
교회는 타자를 위해서 현존할 때 교회가 된다.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 보여준 책임적 행위를 세상에 다시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고난을 감당한 것처럼 교회 역시 이웃을 위해 고난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인의 공동체는 언제나 ‘타자를 위한 교회’여야 합니다.
이 이외에는 오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에서 말씀 하신것 처럼 다른 복음이 없습니다.(갈 1:17)
1. 사회와 분리된 채 오직 개인의 구원과 번영에만 몰두하는 기독교
영성적인 삶과 세속의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직 성장의 틀에만 갇혀 있는
기독교에서 타자를위한 교회로 나가야 한다.
2. 코로나19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목사 중심 구조, 건물 위주 모임, 기복 신앙 등을 진부하게 만들었다. 이 광야 같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 새로운 선교적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3. 이제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
교회 밖의, 성전 밖의, 이스라엘밖의, 그야말로 잃어버린 양떼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지금 이 코로나 시기 교회가 살려면 이웃과 지역사회 즉 오직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의 성장의 틀에 갇혀 있는 교회에서 이웃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타자와 이웃에 있고 존재자체가 선교하는 선교적 교회로 나아가야만 살수 있습니다.
4. 그런데 오늘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할례와 율법으로 돌아가면서 타자를 위한 복음(기쁜 소식)에서 다시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중심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낡은 노예 종교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 1:6)하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자유와 해방의 복음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갈1:78)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