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일 재의 수요일부터 2022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과 바다 항해이야기가 끝나고 예수님이야기는 예루살렘으로 수난 받으러 올라가는 이야기로집중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왜 마가 복음이 제자와의이 예루살렘 수난 여행길 앞뒤에 맹인치유를 배치하였는가 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 벳새다의 소경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미 베풀어주신 5병2어의 이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맹인을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안수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면서 안수해주십니다 그러시면서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이 사람은 움직이는어떤 물체를 쳐다보면서 “사람들이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맹인의 눈에 안수해 주십니다. 그랬더니 맹인이 주목하여 보면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니다.맹인이었던 사람이 이제 눈이 완전하게 밝아져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익형 리더와 사익형리더? 공익형 종교(고등종교)사익형 종교(사이비 주술)
교우 여러분 대통령 선거가 3일후 코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어떤 리더를 뽑을 것인가 여러 기준이 있지만 리더에는 사람에는 공익형 리더와 사익형리더가 있다고 합니다,
종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익형 종교가 있고 사익형 종교가 있습니다, 공익형 종교가 바로 고등 종교이고 사익형 종교가 바로 사이비 이단인 것입니다, 사적 이익을 쫓는 종교는 고등종교가 될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이 타인에 대한 공공성이 없고 보편성 이타성이 없으면 그것은 사교이고 사이비이고 무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사적 이익과 욕망을 비는 푸락거리에 불가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 두 번이나 안수해서 눈을 뜨게 하신일에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오르는 길에 제자들의 상황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끊임없이 사적인 자기주장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과의 갈릴리 호수 항해중 예수님께극단적인질책을듣습니다. “너희가어찌떡이없음으로수군거리느냐. 아직도알지못하며깨닫지못하느냐. 너희마음이둔하냐. 너희가눈이있어도보지못하 귀가있어도듣지못하느냐”(8: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오르는길 10:35 이하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등장합니다.그런데 그등장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꼴사납습니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 몰래 예수님께로 다가가서, “우리가 당신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달라”(10:35)고 하면서 청탁(請託)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10:36)고 물으신다. 대답인즉, “당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우리를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10:37)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등극(登極)을 염두에 두고 지금 한 집안의 두 형제가 “우의정 좌의정” 자리를 달라는 사익형 리더들이었던 것 입니다.
영적 특권의식(유대교),영의 사유화(무속): 교만 /외식/허세
교우 여러분 오늘 세계는 한국의 K문화 콘텐츠 등을 보면서 세계적인 문화 강국이 되었지만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은 보면 아직도 공익형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사적 욕망 채우는 일에 급급합니다. 최근 한국기독교인들아 깨어 일어나라 하는 성명서를 보니 “근래 한국인의 자본주의적 에너지와 욕망은 미국인을 넘어서고, 최대한의 노력을 쥐어 짜내는 집요함은 일본인을 능가하고 있다”라는 평가를 합니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이 모두 들어가 있는 평가가 나오기까지 한국사회 근대화와 민주화의 밑바탕에 한국 기독교가 핵심적인 정신적 추동력으로 역할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독교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이생이후의 생까지 영원히 보장받았다는 기득권 의식(영생 또는 천국)은 일종의 영적 특권의식으로 변하여 일부 특권자들이 영을 가두고 독점하는 영의 사유화(enclosing)가 일어나고 있는데 최근 대권후보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영의 사유화릍 통해 권력을 사유화 해 보겠다는 욕망으로 무속인들과 끊임없이 접속을 하는 일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첫번째 안수로는 사적욕망과 영적 독점과 영적사유화를 넘어서지 못했는데 두 번째 안수로 공익형 리더가 되었고 영의 사회와 공유화가 시작되었다는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다시 맹인의 눈에 안수해 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두번째 안수를 받자 첫번째 안수로 사람과 나무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수준의 맹인의 눈에 다시 안수해서 눈이 완전히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안수로는 사적욕망과 영적 독점과 영적사유화를 넘어서지 못했는데 두 번째 안수로 공익형 리더가 되었고 영의 사회화와 공유화가 시작되었다는 것 인데 오늘 이 시대에 바로 이러한 영의 공유화와 공익형 정치인 신앙인 리더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실천신대 조성돈 교수님은 이를 오늘 교회에서도 교회가 대형화되고 기득권화 되면서 사회와 마을과 소통하려하지 않는 내적인 매커니즘으로 돌아가다 보니까
교회에 공공신학과 마을교회가 필요한 때가 되었다 이야기 하고 계신 것 입니다.
바디매오 치유사건은 이제 새롭게 볼뿐 아니라 이 새로봄의 사건이 어떻게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고 따르는 것으로 연결되는지를 알려줍니다!
교우여러분. 예루살렘 오르는길에 예수를 따라 가지만 그들의 마음은 예수의 길로부터 멀어져 가고 결국 예수의 길을 저주하고 배반과 부인을 준비하고 이탈하기 시작하는 제자들과 뚜렷이 비교되는 모델로 오늘 이 벳세다의 맹인을 두번의 안수 를 통해 완전한무지의 상태(몰이해)에서 시작하여,불완전 이해 를 거쳐 완전한 이해에 도달한 인물로 묘사하기 시작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10장에 나오는 맹인 거지 바이매오의 치유사건은 영적인 안목으로 이제 새롭게 볼뿐 아니라 이 새로봄의 사건이 어떻게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고 따르는 것으로 연결되는 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신앙의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맹인거지 바디메오가 등장할 때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십니다”(10;49절).
여기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의 예루살렘행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맹인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소경을 부릅니다.” 10:50 그러자 그는 그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왔습니다. 10:51 예수님 께서는 그를 응대하여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행하기를(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소경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제가 보기를(다시 보기를) 원합니다.”우리는 여기서 영적으로 눈을 뜨려면 바디매오처럼 그 길에서 예수를 따라 나설때 비로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린다는것 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영적인 눈이 열려 길을 찿을수 있는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맹인과 제자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앞(10:36) 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실때 제자들은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당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우리를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10:37) 고 합니다,
그러나 맹인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내가 너에게 행하기를(해주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그 소경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제가 보기를(다시 보기를) 원합니다.질문에 대한 답변이 제자와 바디매오가 다르다는 것 입니다. 5:52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셨습니다. “가라. 너의 그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윽고 그는 보게(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길에서 그를 따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으로 눈을 뜬다는것은 무엇인가?를 깨달을수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 사람만이 영적인 눈을 뜰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으로 눈을 뜨려면 바디매오처럼 그 길에서 예수를 따라 나설때 비로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린다는것 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영적인 눈이 열려 길을 찿을수 있는 것입니다.
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예루살렘 오르는 길 내내 제자들이 예수님이 권력을 잡으면 누가 우편에 누가 좌편에 앉겠는냐는 누가 높으냐는 자리다툼에 연연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이제 사순절 예수님의 마지막 길인 예루살렘에 도달하면서부터 이윽고 예수님를 저주 배반하고, 예수를 이탈하고 팔고, 그리고 부인하기 시작한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저희들도 두렵습니다.
주님. 선거가 며칠앞에 있는데 .벳새다에 맹인을 첫번째 안수로 사적욕망과 영적 독점과 영적사유화를 고치시고 두 번째 안수로 제자들의 신앙의 영의 사회화 공유화의 모범을 보이셔서 사물을 분명하게 보이세 해 주신것 처럼 오늘 우리의 눈을 고쳐주시옵소서!
주님 바디매오의 눈을 고치심으로서 그가 다시 보게 되자마자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나선것 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뜬다는 것은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따라 나설때 비로서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다같이)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영적인 눈이 열려 길을 찿을수 있다는 믿음으로 각자의 몫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따르기 예수 살기를 감당할수 있는 사순절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