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한달이 남지 않았습니다. 한달후에는 새 대통령이 뽑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납니다.
첫째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했다는데 어떻게 두 번이나 무당이 사회의의 최상층을 지배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법조인들은 아직도 30년전의 노동관과 사회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선진국 되었다 하나 사회양극화와 정치집단의 후진성으로 사회가 무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지금 코로나기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위기속에서
미래가 불안합니다. 무속은 불안한 사람들의 욕망을 당장 채워줍니다, 욕망을 점괘와 길훙으로 길한 날짜 장소 등으로 명시하며 그 욕망을 달래주고 채워줍니다, 욕망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현실로 만들어 채워줌으로서 사람을 혹하게하는 것이 주술의 힘인 것 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국교회는 이 무당들에대해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우리는 무속에 의존하는 지도자를반대한다는 성명서가 여러곳에서 나오고 있는데 대형교회에서 동참하는 예는 없습니다. 대형교회 교인등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냥 교회 나오면 복준다고 하는 설교 이외에 다른 사회와 지역과 마을 공동체와 같은 단단한 것을 먹으면 신앙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둘째는 오늘 한국이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양극화와 불균형으로 사회문화적으로는 아직 후진성을 벗어나기 못하고 30%가 생존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무속에 의존하는 하고 아직도 30년대 독재정권시대의 노동관과 통치체제를 그리워하는 사먄의 지배을 받는 ‘"미성숙 엘리트가 한국사회 지배를 지배하는 가운데 우리는 대선을 한달 앞에 두고 있는 것 입니다.
지금 선거를 앞에 두고 우리는 두가지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586 민주화 세대가 그 민주정신과 시민정신의 시대정신
과 지성을 유지하지못했고 그 자녀들을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의 자녀들로 키워서 그들이
지금 언론과 함께 무당과 독재의 지지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선 우리는 이번 선거를 통해 이번 선거를 좌지우지하는
시대적 흐름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능력주의라
신자유주의적 낡은 경쟁관이 아직도 살아남아 바로 이 시대의
폭군이 되어가고 2030세대의 함정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2030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바로 신자유주의에 물든 능력주의라는 것입니다.신자유주의 세대란 누구인가? 화폐와 돈에게 즉 시장에게 어떠한 규제도 주지 않고 마음껏 세상을 지배할 자유를 준 세상에서 자라난 세대 영국의 대처 미국의 부시 한국의 이명박근혜시대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김누리 교수는 이 능력주의라는 것은 바 이 시대의 폭군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으로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 이라는책에서 능력주의가
우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고, 뛰어난 자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을 공정하다고 여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이라는 룰이 가장 공정하다고 합니다, 셀던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시험이 절대로 공정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이비리그와 같은 엘리트 학교의 진학울을 보면 경제적으로 10프로의 부유층들이 아이비 리그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비싼 과외선생 도움을 받는 학생과 가족을 위해 알바를 해야 하는 학생에게, 공정한 시험의 기회가 부여되어도 그 결과는 정의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셀덴 교수의 미국사회 분석에 의하면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더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 일쑤라고 하면서 샌델 교수는 묻습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회적 불평등에 직면하고도 왜 사회적 약자들은 저항하지 않고, 자살하거나 마약에 빠져드는가. 왜 이들은 불의한 사회에 맞서 싸우지 않고 왜 자기 자신을 ‘응징’하는가. 그것이 결국 미국 하류층이 트럼프를 찍고 결국 오늘날의 미국과 한국에서 역사상 최악의 불평등 사회를 만들어낸 원인이 아닌가?
오늘 2030 세대에는 경쟁과 능력주의가 굳건히 신앙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2030 세대를 사로잡고 있는 능력주의 신화는 사실 자신을 죽이는 신앙입니다. 2030 능력주의는‘내가 잘 나서 성공한 거고 못난 이들이 경쟁에서 패배해서 힘들게 사는 것이다’며 이걸 공정한 거라고 여기지만 큰 착각이라는 겁니다 .우리사회가 바로 이 능력주의의 누룩에 물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바로 세계 최악의 불평등 국가 한국에 살면서도 한번도 이 불평등의 변화와 혁명을 꿈꾸지 못하는 불임 불능의 사회가 되고 말고 이러한 모든 변화의 상상력이 붕괴된 불임사회의 대가는 바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를 감시 학대 착취하는 자살로 마감하는 세계 최고의 자살 공화국이 될수 뿐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자살자가 가장 많은 연유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꾸어야할 사회는 공정하다는 착각’에 터잡은 능력주의사회가 다 함께 같이 사는 공동선 의 사회가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 에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파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현상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과 가장 큰 갈등을 일으키고 헤롯이라는 정치집단과 연대하여 예수님을 마을에서 몰아낸 당대 바로 능력주의자들이 바로 바리새파였다는 것입니다
바리새(Pharisees)란 말은 “분리된 자” 라는 뜻으로 신약시대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형식이나 의식, 관습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금식, 십일조,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에 매우 충실하였으며,.그들의 모든 표준은 얼마나 성서를 알고 율법을 잘지키는 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의 율법신앙은 바리새인들처럼 소자산가들만 지킬수 있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 율법을 민초들이 접근핧수 없은 진입장벽으로 만들고 회당에서 인정하는 의인일 되려먼 이러 이러한 올법을 지키라는 39가지의 진입장벽과 옵션인 안식이 율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을 지킬수 없는 민초들을 죄인이라 불렀습니다, 사실 당대에 일반 민초에게 율법은 지킬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이되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당시 민초에세 뒤집에 씌은 죄인이라는 개념이 바로 오늘 이시대의 능력주의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 당시의 민초들이 불평등과 불의에 직면해도 분노하거나 저항할수 없었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바로 이 바리새파의 죄인이데올로기인 것입니다,
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중독되면 자신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수 없는 이유를 율법을 만든 기득권적 사회구조에서 찾지 않고, 인식일 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죄됨과 무능에서 찾고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규정짓는 죄인에서 찾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는 세계에서 자기착취가 가장 심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불평등한 율법을 문제삼기 보다는 율법과 죄인이라는 이름으로 늘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 억압하는 내면적 감시자를 만들어 그 율법에 순종하고 율법을 더욱 공고히 하고 이들을 감시하는처벌하는 검사 공화국을 더욱 공고히 해나간 것이 바로 바리새이즘이 지배하던 유대 사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쫓겨나서 이방땅 항해에 나설때 오히려 제자들은 바리사이의 누룩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 갈등의 항해 한가운데로새로운 협력자와 제자도로 세 여인이 등장하는 것 입니다.
이 율법이 씌어놓은 죄에서 해방을 선포한 최초의 사람은 바로 세례요한의 요단강 세례운동입니다. 세례요한은 성전에서 소와 양과 같은 비싼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요단강가에서 물에서 죄를 씻을수 있다는 혁명적 죄사함의 운동이 일으겼습니다,
청년기에 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예수님은 갈리리 마을로 오셔서 회당밖 마을과 가정집에서 죄인을 치유하고 죄사함을 선포하면서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게로 오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마을에서 회당중심의 이 율법적 능력주의와 유맞서 싸우다가 마을에서 쫓겨났을때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 보다는 오리려 이 능력주의의 포로에 물들어 가는 이 갈등 사건이 바로 가버나움에서 이방땅으로 항해하는 중 깊어졌으며 이때 예수님을 마을운동을 이해하고 이 치유와 해방운동을 돕는 새로운 제자들이 등장하는데 이 여인들이 바로 하혈병 걸린 여인과 회당장의 딸과 그리고 수루보니게 여인들이었는데 이 항해 여행 막바지에 예수님이 바리새의 누룩을 조심하고 깨어 있으라고 제자들에게 다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어렷을적에 밥상에서 형님이 어머님께 묻던 성서이야기는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이었습니다, 하루는 형님이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왜 오후 늦게 오는 품꾼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느냐 참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어머님이 특별한 대답을 하지 못하시는 것을 보고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집안일에 충실한 장자를 제끼고 돌아온 탕자를 맨발로 맞아들이는 하나님의 행동도 불공평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저를 설득시키실 만한 뚜렷한 답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제가 신학생이 되어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에서 바쁜데 집안일을 돕지 않는 마리아에게 야단을 처달라고 하는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 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나 돌아온 탕자이야기와 포도원 일꾼 이야기 모두가 지금와 생각해보니 이 모든 성구가 바로 바리새의 외식주의 능력주의와 대항하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 복음이었던 것 입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어떤 신학자는 오늘 한국교회는 상당 부분 이러한 바리새적
근본주의자들에게 점령당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바리새적 근본주의 신앙에 물들게 되면 우리의 신앙의 이성적 기능은 정지하고, 삶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오직 종교적 제도와 건물을 위해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도록 강요 받게 됩니다.
주님 오늘 한국교회는 오직 교회 성장이라는 바리새적 외식적 능력주의만 남아 우리의 신앙은 오직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체면주의로 성구나 외우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주님 더구나 이러한 바리새적 근본주의 집단이 대형화되가 시작하면서 ,, 이러한 바리새파의 누룩이 번져 나가면서 “무당이나.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신명기 18:9-14)하는 성서의 말씀을 어기고 무속세력을 지지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 새롬교인들은 이 바리사의 누룩을 조심하고 깨어 있으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전하길 원합니다.
주님 이제 남은 한달간 우리 신앙인들의 책무는 해방 이후 친일세력을 포함하여 모든 기득권 그룹이 총집결한 이 상황을 이겨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앞으로 한달동안 이러한 바리새적 능력주의와 미숙한 미신이 지배하는 검찰 공화국을 저지하는 공의로운 한표를 행사할뿐 아니라 주변에 이 바리새파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새롬 교회 교우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