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갈릴리가 좋았다.갈릴리에서 배를 타면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갈릴리호 변을 따라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사람을 부르시고,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의 진한 냄세를 느낄수 있었다. 갈릴리 호수와 나사렛 등 가버나움의 이 일대는 바로 예수님의 신나는 미션(선교) 축제가 집약된 곳이고, 우리는 2000년후 다시 이곳을 여행하면서도, 갈릴리와 가버나움 가나 일대의 마을과 마을을 도시며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그 축제적 삶의 열정이 갈릴리를 넘어 온 유대땅 으로 전진하고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2007 갈릴리 성지순례 일기)
예수님의 청년기에 예수님 앞에는 세가지 장소가 나타나 있다. 그 첫 번째 장소는 당시 유대교의 중심인 유대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다. 두 번째 장소는 세례요한이 머물러 있던 광야이다. 그리고 소외된 가난한 백성들이 있는 갈릴리 마을이 세 번째 장소이다. 예수님은 청년기에 광야로 나가신다. 그곳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시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선교적 비젼을 세우신다.
2.세례요한의 광야의 세례운동과 청년예수의 갈릴리마을운동
예수님은 갈릴리 마을로 들어오시기 전에 먼져 광야로 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수련을 받는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은 성전이었는데, 세례요한은 그 성전 밖 광야에서 세례 운동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에 대한 큰 도전을 의미 한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에 나와서 제사장들로부터 죄사함을 받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죄가 용서 받을수 없다고 하여 성전에 제물을 가지고 나와서 성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신앙인 인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요단강물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면 사람들의 죄가 사해진다는 혁명적 죄사함을 이야기 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과 예수님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광야에 나가서 세례를 받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 성전중심에서 다시 출애굽기와 예언자 중심의 광야 신앙으로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청년기에 요단강가로 나가 요한으로 부터 세례를 받고 그곳 광야에서 40일간 악령으로부터 3가지 유혹을 받으며 수련을 하게된다.
마가복음은 길의 복음이다, 광야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의 수련을 거친 예수님이 갈릴리의 마을에 들어오시면서 하신 일성은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이었다. 이 말씀에 대해 갈릴리의 젊은 어부들이 그물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길을 떠나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도 신발끈을 매고 모든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길을 출발할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 되셨는가?
3, 에수님은 갈릴리 호수가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길을 떠나자고 제자로 부르신다!!. (마 4:18-22)
요한복음 1:43-51 에 의하면 어느날 가버나움 변방에 새로운 메시아 운동의 방향을 찾던 젊은이들 중에 안드레와 빌립이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할 때, 이러한 안드레와 빌립의 감탄에 대해 나다나엘은 아주 시니컬한 반응을 한다.“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온다는 말인가?”.예수님은 당시 자신의 지역과 공동체에 대한 열등의식에 빠져있던 갈릴리 일대의 청년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을 외치셨고, 청년들이 “와서 보아라!”라고 응답함으로서 당대 청년들에게 새로운 복음의 길을 제시 하셨던 것이다.“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심판을 준비하는 분위기라면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분위기는 결혼식 잔치를 준비하는 분위기요, 그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었다.요한은 광야에서 낙타가죽을 걸치고 야생꿀을 먹으며 고행과 단식을 하였다면, 예수는 갈릴리에서 어부와 농민들과 즐겨 먹고 마시며 밥상공동체와 결혼식 잔치를 만드셨던 것이다. 확실히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심판을 준비하는 분위기라면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은 즐겨 먹고 마시며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결혼식 잔치 준비를 하는 신랑의 분위기 이다. 그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만큼 예수님은 사람들을 친구삼기를 좋아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갈릴리 마을에서 젊은 어부들에게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낚은 어부가 되라했던 청년 빌립 안드래 나다니엘은 누구인가?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에 의하면, 19세기 조선 역사 전반에 걸쳐 조선의 서당 수는 2만1000여개 학생은 26만여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서당의 대중화와 지식유통체계의 확산과 함께 특별히 주목해야 할 현상은 ‘새로운 평민 지식인’의 등장이라고 한다. 역사적 에수를 연구한 리차드 호슬리 교수는 예수는 팍스로마나(Pax Romana)와 유대 분봉왕들의 학정 속에서 신앙공동체의 전통은 물론, 삶의 터전까지 잃어가는 농촌 공동체를 되살리려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역사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은 제국의 로마화와 분봉왕 헤롯 가문의 도시화에 저항하여 농촌 갈릴리의 가족과 마을의 전통 (예를 들어 상부상조,네 이웃을 사랑하라와 같은 덕목)의 회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처럼 갈릴리 예수는 수많은 소 농민들 중 하나, 아니면 그 농민들의 동료로서 그들의 삶을 함께 하고자 했으며 기존 질서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격동의 시대에 억압받는 농민들을 위한 마을 공동체를 재 창조하고 활성화 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을 비교해 보면 예수운동이 갈릴리 마을 공동체에 견고한 뿌리를 둔 것처럼 동학도 마을 공동체에 동학(東學)’이라는 종교 집단의 견고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에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마을에서의 ”귀신축출와 질병치유와 밥상공동체와 비유를 통한 민중교육“ 이라는 일종의 마을의 학습 문화 복지의 마을의 마당 생태계(영적 돌봄망 플랫폼)를 통한 마을공화국 건설 운동이었다. 이와 비숫하게 동학에서도 ‘포(包)’와 ‘접(接)’을 단위로 하여 6임제(六任制)를 실시하였다.그것은 한국 소농 중심 사회의 특징인 마을조직의 강건함을 보여준다. 동학의 포접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접주또는 포주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을이 있었는데, 동학 창시자 최제우와 동학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김개남,손화중은 서당 훈장이었고 이러한 굳건한 마을의 조직적 기반에 힘입어 동학조직도 건재하였다는 것이다,
“평민 지식인 제자로 부름 받은 하나님 나라의 어부들” [마가복음 1:16-20]
안드레와 빌립 나다나엘등 갈릴리의 소농과 어부 출신의 젊은 청년들은 갈릴리에 나타난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되었다.이 사실은 예수의 제자들이 바로 당시의 갈릴리 마을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갈릴리 마을의 동학의 전봉준 김게남 손화중 같은 평민 지식인들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떨칠수 없는 이유이고, 이것은 오늘 마을대학운동을 출발하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을의 평민지식인과 마을대학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면 우리 역사에서 18-19세기 1894 동학,1919 3.1운동 1980 광주민중항쟁,1987 민주대항쟁, 2020 촛불 혁명등등 이 모든 마을운동과 시민 민중운동의 기초는 이러한 각성된 평민지식인 기반의 일종의 마을대학의 기초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기독교 마을공동체 운동과 마을 교육 운동을 다시 정리해 본다면,1980년 민중교회운동과 2000년대 작은 교회 운동, 2020대 마을교회 운동등 모든 기독교 마을 운동 시민운동도 모두 마을의 평민 지식인들이 기초가된 일종의 마을대학운동과 마을공화국 운동이었고, 19세기 그룬투비 목사의 위대한 평민을 교육하는 자유교육운동 등 서구의 마을대학 운동도 바로 평민지식인 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볼수 있다.
예수님의 갈릴리 지역에서의 마을 사역의 핵심은 귀신쫓아냄(악령추방),병자치유, 밥상공동체. 비유로의 가르침으로 볼수 있다. 예수님이 누가 복음 4;16-19절에 나와있는 갈릴리 마을에서의 가난하고 눌리고 눈먼자의 해방[눅 4:16-19]선언은 일종의 갈릴리 마을 공화국 운동 선언이었고, 평민 지식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선언문 이었다. 이 누가의 가포눈눌 이라는 사명선언은 마가 복음의 귀신쫓아냄(악령추방), 병자치유, 밥상공동체, 비유교육등이 하나님 나라 마을공화국 선언으로 발전된 것이다. 이중 현대에서 가장 소홀이 취급되는 것이 바로 악령추방이다.예수님의이 악령 추방 사건은 갈릴리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와 유대교라는 정치종교적인 세력과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3. 회당과 마을 사이, 온 동네가 그집 문앞에 모였더라!
마가 복음에는 예수님이 마을에 들어가시기 전 회당에 들어가셔서 회당의 악령을 내 쫓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당시 유대교라는 종교의 중심인 회당이 사실 악령의 소굴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회당이라는 거룩한 공간에 사실 악령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1;27)
예수님의 최초의 선교 사역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대교 회당에서 나와 마을의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막1;29)라는 는 이 문장은 놀라운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마가는 분명 이 ‘집’을 ‘회당’과 대비되는 구도로 설정해 놓고 있다. “나와서” “들어갔다”는 상반되는 두 개의 동사는 회당 즉 당시 유대교에서의 이탈을 말할 뿐 아니라 이 ‘시몬의 집’을 예수님 일행의 새로운 활동 거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가가 이 구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하다.“회당에서 나왔다”는 것은 기존 유대교의 거점인 회당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이 마을에서 시작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마가의 입장에서 보면 회당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새 술이 새 부대를 필요로 하듯이, 기존의 유대 공동체로는 하나님 나라를 담을 수가 없다. 그래서 회당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시몬과 안드레의 집은 새로운 활동 거점으로 택해진다. 그래서 에수님이 회당에서 나와 베드로의 장모의 집이 있는 마을로 들어가셨는데“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막1:33)는 것이다. 이제 회당에서 나와 마을의 집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회당에 대립되는 새로운 공동체가 여기‘시몬의 장모의 집’에서 생겨났다면 결국 베드로의 장모라는 한 여인이 일으켜 세워짐으로써 그곳에 교회도 세워짐을 의미한다. 그 장모는 처음에는 아픈 사람으로서 시중을 받던 사람인데 예수의 일행을 만난후에는 시중을 베푸는 선교사로 바뀌게 되고,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막1;32-33)라는 말씀처럼 해질 때 온동네가 그 집 문앞에 모여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자들을 고치는 마을의 치유캠프”가 되었다는 이야기 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마가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지금 마을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4. 귀신을 내쫓고 치유하신 예수(막1:33)
지금 새로운 공동체가 베드로의 집을 중심으로 탄생하고 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였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회당과 다르게 마을은 그 문턱이 낮아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오갈 수 있었다. 그래서 회당이 아니라 회당밖 베드로의 장모의 집이 바로 예수님의 치유의 베이스 캠프가 된 것이다. 이렇게 에수님이 갈릴리 마을 일대에서 베드로 장모의 집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키시자 예수님은 이곳을 거점으로 갈릴리 가버나움 일대에서 낮에는 복음전도를 하시고 밤에서 각색병을 고치신다.(막1:29-34) 그리고 새벽 미명에 하나님 앞으로 나가 새벽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시고,새벽 미명에 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막 1:38)
이처럼 마가복음 1장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집이 가버나움 마을의 새로운 선교적 거점이 세워지기 시작하자, 마가 복음 2장에 이르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좀더 구체적인 윤곽을 들어내기 시작한다. 베드로의 장모집 앞이 회당의 대안으로 새로운 치유장소로 등장하였다면 이어서 2장 13절에 또 다른 새로운 공간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알패오의 아들 레위의 집“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마을 운동의 새로운 밥상공동체와 하나님나라 잔치 운동의 거점으로 등장 하고 있는 것이다.
“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 2:16).
이처럼 예수의 갈릴리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을 거점을 삼았다. 그리고 예수의 선교에서 중요한 점은 예수의 선교는 개인이나 가정을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마을에 초첨을 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마을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환영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치유가 베풀어 지고,그 마을에 일정한 기간동안 한 집에 머물면서 선교를 하였지만, 거절하면 마을전체에 대한 경고가 내려진다.“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마태10;14) 그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향하라하는 복음서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 제자들의 선교 사역의 초점이 바로 마을 단위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제자들은 일정한 기간동안 한 마을 머물면서, 예수님의 악령축출과 치유 사역을 하였는데, 이 역시 자비를 베푼 개별적 행동들이 아니라, 개인적 및 사회적 치유라는 사회적 몸을 치유하고 세우려는 좀 더 큰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일부로 보아야 하겠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악령 축출하고 치유를 행하면서, 그 마을이 공동으로 함께 사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힘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예수님의 갈릴리 마을 활동 캠프들 (마가 복음 1-4장)
마가복음에서 집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것으로서 회당과 성전과 대비 된다, 마가는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내놓은" '집'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이 마을 한가운데의 집을 그 지역의 선교 근거지로 삼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마가 복음의 지역 선교의 근거지로 삼은 마을의 그집들을 좀더 입체적으로 보면 “마을의 집”이라는 근거지는 베드로의 장모의 집과 같은 치유 캠프와 알패오의 아들 레위의 집 앞마당과 같은 밥상 공동체 그리고 가나의 잔치와 같은 잔치공간이나, 소그룹 교육 공동체나 후원 캠프 등을 볼수 있다. 이는 우리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마을 전체를 하나의 전략적 캠프나, 공유지와 같은 선교적 생태계와 공화국으로 형성하려는 흔적으로 볼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품게 한다. 이러한 상상력으로 앞에서 서술한 마가복음 1-4장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갈릴리 마을 하나님 나라 운동을 다시 요약하면 ①.베드로의 장모의 집과 같은 치유 캠프와 ② 알패오의 아들 레위의 집 앞마당과 같은 밥상 공동체 ③.잔치와 교육 공간이나 후원 캠프로 사용한 들판과 호숫가등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갈릴리 마을과 마을 사이에 “갈릴리 마을 활동 캠프(마을 공유지 혹은 공화국)”를 세우시면서 역동적으로 “갈릴리 하나님 나라 마을 운동”을 움직여 나가신 것 같다.
6 고립을 뚫고 협동과 연대로
오늘 에수님은 문둥병자를 통해서 당시 유대 사회의 차별과 배제를 보고 그것을 넘어 서시려고 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 문둥병 환자를 치유하시는데 그 치유의 방법이 직접 문둥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자 문둥병이 떠나 갔다고 되어 있다, 오늘 문둥병의 근원이“고립과 격리”였다면 치유는 예수님의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신 것 처럼 “접촉과 관계”라는 것이다.그것은 우리가 건강한 인격 건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고 치유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개인적으로 고립 자폐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사회성과 관계와 접촉이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2:4)“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막1;41)
문둥병 환자 치유 후의 두번째 치유 기사는 중풍병자를 치유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이 바로 고립에서 협동의 차원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오늘 이 중풍병 환자의 친구들은 서로 어깨 동무하고 중풍병환자를 들쳐업고 지붕을 부수고 예수님께 나가고 있다. 이러한 중풍병자 친구들의 협동과 연대는 바로 예수를 둘러싸 중풍병 환자를 들쳐 업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로 나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 무리(군중)를 넘어서고, 이것이 협동과 연대라는 집단적 지혜로 진화하여 결국은 지붕을 뜷고 만다. 이 치유 이야기의 결론은 개인에서 공동체로 나가며 공동체와 관계적 몸을 만들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때 예수님의 “내 믿음이 너를 치유했다!”라는 “속죄의 치유 선언”이 선포되며,우리들 가운데의 죄와 상처가 협동과 연대를 통한 속죄로 치유될때,중풍병환자가 일어나 걸을수 있다는 것이다.
7.젊고 유쾌한 밥상공동체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마가 2;16)
예수님은 늙고 낡은 이러한 유대교의 “차별과 배제”의 세계에서 나와 세리와 죄인들 사이로 들어가 밥상을 펴고 함께 어울리고 사귀며 나누며 먹는 젊고, 유쾌하고 생기 발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던 것이다. 결국 유대교가 율법으로 서민들을 숨 쉴수 없도록 죄어 올 때. 예수님은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무한 개방 용서 긍휼 은혜를 베푸셨다.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자, 하나님 나라 축제 주관자인 예수그리스도는 한번만 실패하면 바로 죽음이고 조금만 실수해도 바로 목을 조여오는 바리사인과 같은 숨막히는 낡은 유대교적 삶의 생태계를 넘어서 가난한자,죄인,세리와 모든. 배제 차별. 마비된 자들을 7번씩 일흔번 용서하고, 무제한의 개방 용서 수용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님 은혜를 세상에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를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생태계는 하나님의 백성을 차별과 배제와 불안과 공포의 낡은 율법적 생태계로 옭아 매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 개방 용서 수용을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은혜의 생태계로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의 숨과 부활의 생명을 불어 넣어 이 사회를 다시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본문에 마가 복음의 제자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이 의미는 예수를 따른다는 것과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 가정과 마을을 알패오의 아들 레위의 집 밥상처럼 밥상공동체로 만드는 것이고,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 밥상공동체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다. 바로 알패오의 아들 레위 집의 밥상이 천국이요,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깨닫는 것이다.
8. 불안 공포 마케팅을 날려버린 예수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요한 5;2-3)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는 38년이 된 오래된 환자 였으나 그는 한번도 치료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 38년된 환자가 38년동안 치유의 기회를 얻지 못한 핵심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져 들어가야 한다는 롯도 복권과 같은 요행을 바라는 심리적 상태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한5:8)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38년된 환자의 가장 큰 문제는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져 들어가는 이 실행될수 없는 미신적 경쟁의 확률에 목숨을 건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좀더 확대 시켜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가 1;99의 사회가 되어버렸는데, 이처럼 1;99가 되어버린 사회의 숙명론을 끊어 버리기 보다는 1;99중 1이 되는 그 행운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겠다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에 대한 열광과 고정관념은 봉준호 감독의“설국 열차” 라는 영화에서 메디슨 총리에 의해 반복되어 외쳐진다. "성장 엔진이 멈추면 모두 죽는다. 그러니 너희는 꼬리칸 우리는 앞칸 자기 자리를 지켜라!" 그러나 열차 밖으로 나가면 모조리 얼어 죽을 거라고 믿던 설국열차 안의 사람들의 생각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결국 거짓이라는 것이 들어난다, 앞으로가 아니라 옆으로 새로운 생태계로 나가야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까지의 "성장 엔진이 멈추면 모두 죽는다" 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룰과 상상력과 생태계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여행하실때 항해중 파도로 인하여 공포에 질린 제자들 앞에서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공포에 질린 제자들 앞으로 물위를 걸어오신 이유도 "성장 엔진이 멈추면 모두 죽는다." 그러니 "자기 자리를 지켜라."라는 지금 이세상에 공포에 의해 앞도 당한 제자들에게 ‘지금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하나님 나라 새로운 생태계를 꿈꾸며 성장 엔진의 앞자리를 장악하는것이 아니라 옆으로 전적으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와 생태계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은 아닐까?.바로 물이 동할 때 남보다 먼져 뛰어드는 무모한 경쟁을 포기하고, 지금 너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협동과 자립과 연대”의 새로운 그 길로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 나가라는 새로운 삶의 생태계를 향한 명령인 것 이다!!
9. 춤의 왕,잔치꾼 예수
80년도에서 9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 80년대의 잔치가 끝난 것을 아주 탁월하게 묘사하여 최영미 시인을 유명하게 한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아주 유명한 시의 한 구절이 있다.
“ 잔치는 끝났다. 술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샘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찿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대신 상을 치우고 그모든 것을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리란걸, 그가 부르다만 노래마져 고쳐 부르리란걸, 어쪄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전에 다시 사람들은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 (최영미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1994년)
늘 잔치가 끝났다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판을 깨고 서둘러 떠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포도주가 떨어지자 잔치가 끝났다고 수근대기 시작 한다, 주섬 주섬 옷을 입고 지갑을 챙기고 돌아 가려고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포도주가 떨어진 때를 경험하면서 살 때 가 있다. 세례 요한은 먹지고 마시지도 않는 금욕주의자라면, 예수님은 즐겨 먹고 마시는 잔치꾼이요, 세레요한의 분위기가 임박한 심판을 요구하는 장송곡의 분위기라면, 예수님은 즐겨 먹고 마시며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결혼식 잔치 준비를 하는 신랑의 분위기 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고 그들과 함께 밥상공동체를 만드시고,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갈릴리 일대에는 새로운 희망이 살아났다. 새로운 믿음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꾼은 언제든지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이요 언제든지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이요, 언제든지 춤을 출 준비가 되어있는 춤꾼이 되어야 하는 것 이다. 에수님은 갈릴리 일대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의 춤을 추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잔치를 준비하셨다.그것은 빵 5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이 먹고도 남는 잔치이요, 50명씩 100공동체 이든지 100명씩 50공동체 이든지 즐겨 공동체로 나누어 서로 나누고 먹고 마실때 12광주리가 남는 잔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세상의 밥으로 세상의 떡으로 나누어 주실 때,그리고 자신의 피를 세상의 음료로 나누어 주실 때,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다시는 배고프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는 잔치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준비하신 천국 잔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 나라의 춤의 왕으로 부름 받은 우리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좀 썰렁한 상황이 닥칠찌라도, 즐겨먹고 마시는 자라고 비난을 받을 지라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놀리움을 받을 지라도, 그 춤과 잔치를 멈추어서는 안된다. 조그만 밥상공동체가 잔치집으로 변할때까지, 물이 포도주로 변할때까지, 빵 5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이 먹는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이 믿음의 춤과 천국 잔치는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이다.결국 춤의 왕 예수는 갈릴리 일대에서 최대의 잔치를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바로 빵 5개와 물고리 두 마리로 오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인 것이다. (눅 9:10-17)
=== 2024 약대동 부활절 마당극 ==
10. 갈릴리 마을 에서 쫓겨난 예수,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다
우리가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예수님의 갈릴리 마을사역을 요약하면 ,,,
첫째는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회당에서 마을로 나왔다는 것이고, 마을의 베드로 장모님집 앞 마당에 온동네가 모이고, 중풍병자의 집앞에는 사람들이 용신할 수 없이 모이고, 알패오의 아들 레위의 집에는 밥상이 펼쳐지면서 갈릴리 마을에 새로운 마당이 형성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그 일행은 더이상 회당 중심의 건물이 아니라 마을과 집을 연결한 선교 네트웍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신 것을 의미 한다.
마가복음의 베드로 장모집앞 치유마당, 용신할 수 없었던 중풍병자 집앞 협동마당, 레위집 밥상마당, 이 모든 마당은 가정집이지만 마당이었고, 마을의 공동체의 이야기를 마을의 마당극으로 입체화한 마을의 공유지대이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러한 마을의 공유지대와 마당에서 무엇보다도 홧병환자,중풍병자와 문둥병자들에 의해 예수님의 침묵(치유전파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들 마을의 민초(오클로스)들에 의해 일종의 마당극적 연극적 요소가 덧붙여져 가며, 전달되고 있었다. 이 전달 과정에서 전달 참여자인 오클로스 민초들이 스스로가 말하고 서로 돌보고 서로 치유하는 마을의 마당극처럼 발전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 마을 교회들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마을의 사회적 플랫폼으로서의 마당극의 공유공간이 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 마을교회 스스로가 마을의 마당극이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도 성서의 복음 이야기는 마을의 마당극의 대본이 되어 예수님이 장모의 집 앞마당에서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 레위집 앞마당에서 밥상을 펴시는 장면. 중풍병자가 지붕 뚫고 내려 올때에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했다!”라는 죄 용서 선포하는 장면처럼, 다시 한번 현장성 있게 역동적인 무대와 마당으로 예수복음이 재선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제 우리의 성경 말씀과 복음은 예수님이 바리새파에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신랑이 왔을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시는 예수님이 말씀이, 마당극의 말뚝이 이야기처럼,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생생이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들려지길 바란다. 죄인들과 함께 즐겨 먹고 마시는 축제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금식이라는 경건의 외식과 차별과 배제로 대응하는 위선적 바리새주의에 대해,“인자는 의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왔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 시대의 “역동적인 풍자와 해학과 비판과 대안과 희망”으로 부지런히 재 해석 되기를 바란다.
당시의 오클로스 민초들이 예수님과 만나며 이루어진 치유 사건을 소문을 내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문을 내고 말았다. 이러한 예수의 마당극 운동은 촌락회당의 헤게모니 세력인 바리사이와 갈등을 일으킨 후 더 이상 회당 안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다(막 3:6).
예수는 적대자들과의 다섯 차례에 걸친 긴 논쟁을 마치고 호숫가로 물러난다. 마가복음은 극적 사건이나 대중들의 열광적 반응 다음에는‘광야, ‘외딴곳’,‘호숫가’ 등과 같은 한적한 장소로의 이동을 통해 성찰적 거리감을 확보하는 ‘나아감과 물러섬’의 패턴에 따른 장소의 이동을 택한다. 그리하여 마을 밖 외딴 공`터인 산과 들과 호숫가가 예수의 주된 대중활동의 공간으로 활용되게 된 것이다.
마을에서 쫓겨나 산과 들과 호숫가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첫째로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연이 주는 생태적 낙관론이 담겨 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가 일하는 방식은 자연의 무위와 비슷하다. 즉 생명의 현상은 인간의 노력과 이해를 넘어선 무위와 은혜의 세계에 터를 잡고 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와 마을 공동체 교육의 이상이 담긴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은 이처럼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위축되어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 수고하고 길삼도 하지 않는다 하면서 ‘하 찮아보이는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과 은혜와 자비와 소망을 읽어내면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하는 인간의 노력을 넘어서는 생명의 가치를 이야기 하고 있다.
예수의 비유 교육의 핵심은 바리새처럼 신자화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도래의 임박성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행동화이었다. 마을에서 쫓겨난 예수 비유로 무엇을 가르쳤는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와 마을 공동체 교육의 이상이 담긴 겨자씨 비유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와 같다 한다. 이 작고 유한한 겨자씨에서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본 것이다. 겨자 식물은 다 자라도 1m 남짓으로 아주 ‘작을 뿐’이다.. 땅 위에서 겨자씨의 결국은 우뚝 솟은 백향목이아니었다. 우주의 중심에 선 세계수는 더 더욱 아니었다. 그저 겨자 나물일 뿐이었다 또한 그 나물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에 있지도 않는다. 이스라엘 땅의 어느 곳에라도 하찮게 존재하면 된다. 예수는 ‘중심’과‘높이’의 메시아 왕국을 포기하였다. 중심을 혁파하여 차라리 주변으로 만들었고 높이를 꺾어 오히려 낮음으로 만들었다! 현실 세상에서
모든 이들의 염원이 중심으로 진출하여 높이 오르는 것이라면, 비유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란 바로 ‘주변’과‘낮음’의 세상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유대인의 거대 우주수인
백향목이 아니라 한낱 잡초에 불과한 겨자풀의 세상 즉 우리 일상의 마을 공동체에 임하는 새로운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핵심 단위는 백향목과 같은 세계나 우주가 아니라 바로 마을이고 이 마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 나라은 마을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이댜. 그러므로 우리의 마을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자라나기 시작하면 마침내 일은 벌어진다. 한국에 이러한 겨자풀과 같은 마을주변에서 쉽게 발견되는 식물이 있다.그것이 바로 쑥인데 이 쑥도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지 사방으로 퍼져 그 주변이 쑥대밭이 되고 만다.
올해 2024년 우리 마을대학 예수 제자(평민지식인)들은 이 예수님의 평민복음을 우리 약대동 마을과 도시 부천에 전해 약대동과 부천을 하나님 나라의 평민공동체로 제자 삼아 나가야 하겠다.그렇다면 우리 마을대학은 그 생명력으로 조만간 마을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 주변을 하나님나라의 생명력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한알에 담긴 하나님나라의 구체적 모습이고 겨자씨 비유의 궁극적 가르침이다.
마을교회 운동과 마을 대학 운동이 만나다 (부천 마을 대학 경과 보고)ㅡ마을대학은 좋은 시민 좋은 주민 좋은 교인의 삶, 행복한 시민사회와 마을 살이를 위해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함께 배우고 익히자는 취지로 시작합니다.기존의 학교교육은 배움과 가르침이 분리되어 있지만, 마을대학은 “교학상장”이라는말처럼 배우고 가르치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마을대학은 지역에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연결하고 활용해, 비슷한 뜻을 가진 분들이 모여 함께 배우는 마을교육공동체입니다.
마을대학은 시/군/구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의 정신과 방식을 기초로 운영됩니다. 근대화의 초입에 중국의 손문은3민(민족, 민권, 민생)에서 길을 찾았지만, 글로컬의시대, 지구환경위기의 시대는 새로운 길이 필요합니다. 자유로운 개인, 자치하는 지역, 공생하는 자연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우리 약대동 마을과 도시 부천에서 마을대학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마을에서 쫓겨나신후갈릴리 호수길을 횡단하여 이방 땅으로 건너가는 횡단 여행을 감행하셨다(막4;35-39.마을에서 쫓겨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자!”며 예수님의 이방선교의 항해가 시작된다.예수님과의항해중제자들은 풍파를 맞이하자 ❶.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 ❷ 유령이다. ❸ 빵이 없다고 두려움과 공포를 표현한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항해하면서 낯선 항해를 통해 우리가 경험한 공포와 두려움을 이야기 해 보자!••
복음을 유대 땅에서 이방 땅으로 확산시키는 교두보와 교차점
가버나움과이방땅을잇는 예수운동의 아름다운 협력자들(막5:25-41)
내 뒤를 따르라” + “버리고 따랐다”는예수운동에 참여한 제자들이 있다면” 예수님이 네 집으로 가서” 하나님 나라 일을 하라고 하는 (예수님은 이 세 사람에게는 모두 ‘휘파게’라는 용법을 쓴다)지역 협력 유형의 활동가(거라사청년, 하혈병,수로보니게여인)들이 있었다.
1.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거라사의광인)에게 말씀하셨다.•“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5,19)
2.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열두해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5,34)
3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시로페니키아출신 헬라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7,29)
바리새와 헤롯의 누룩에 오염되어가는 제자들과 항해중 만난 지역 협력자들
1. “고립된 무덤가 광인에서 데카폴리스의 전도자로!”
2. 예수의 옷깃과 접촉하는데 성공한 하혈병 걸린 여인
3 빵 부스러기로 데카폴리스 선교를연 수로보니게 여인과
바리새와 헤롯의 누룩에 오염되어 가는 제자들과 항해중만난 지역 협력자들의 서사
부자 청년,(실망하고 떠났다) vs 하혈병여인
첫 번째 인용문인 〈마가복음〉 10,17~22은 예수와 어느 부자인 청년과의 대화 부분이고, 10,46~52는 시각장애인 이던 어떤 거렁뱅이와 예수의 대화를 다루고 있다. 어떤 젊은이가, 그는 재산이 좀 있는 사람인데, 예수에게 찾아와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는데,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예수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한다. 그런 뒤에나 ‘나를 따르라’고 말한다. 즉 그 청년이 예수에게 말한 것은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고, 예수는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그 청년은 실망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부자청년의 소시민 의식이 부자 청년의 제자의 길 방해 영화 기생충을 보면 주인집사람이 하층계급을 보면서 그들에게 지하철과 반지하 냄세가 난다고 합니다. 이처럼 소시민 바리새인들은 늘 사람의 다양한 피부색과 외모 와 체취와 냄세(기생충)로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합니다. 이러한 바리새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막 7장 15~16절)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부자청년의 소시민의식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로 나가는 생명의 길을 방해 합니다, 부자들의 소시민성은 그 까탈스러운취향으로 성서의 복음의 진리를 자잘한 계층의 취향과 도덕으로 전락시킵니다. 결국 생명의 흐름을 자르고 생명의 역동성을 막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새적 소시민성이 결국 부자 청년이 모든 율법을 다 지켰지만 그 율법지킴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길이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그 길을 막은 것 입니다.
왜 부자청년은 실패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 하혈병걸린 여인과 부자청년을 비교하면 부자청년이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왜 예수를 따르는데 실패하는 가를 볼수있습니다.
지금 하혈병걸린 이 가난하고 오염된 여인은 유대교의 이른바 ‘성결법전’(Holiness Code)에 의하면 여성이 생리 중인 것을 ‘불결한 상태’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 입었던 옷, 그녀의 몸과 닿았던 것이 모두 불결하다고 한다.마치 코로나에 감염되었을 법한 불결한 외양의 사람이 거리를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이 율법에 의하면 하혈병걸린 여인이 예수께 도달하는 동안 많은 사람 과 접촉할 수밖에 없었고 그 수많은 사람들과•예수를 종교적 차원에서 오염시켰고 특별히 유대 정결례에 대한 절대적인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이 하혈병걸린 여인의 이러한 예수에게로의 접근은 당시 율법적 윤리의 시각에서 보면 ‘새치기’요 일종의 폭력이요 불법이었다는 것이라 에수님이 누가 내 몸에 손을 대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유대교 율법 즉 정결례를 벗어 버리고 예수께 도달하기 까지!!
그런데 이 여인의 하혈병의피가 마르는 치유는 …(그녀가 그의 옷을) 만졌다. ‘만졌다’라는 이 마지막 동사에 이르러서야 클라이맥스에 도달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 접촉과 ‘만짐’이야말로 기적의 시작이며 치유의 결정체이다.예수님의 치유 기적이야기들 중 절대다수는 신체적 접촉(=만짐)을 통해서 발생한다.
그런데 그 만짐은 예수님 편에서 병자를 만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하혈병 본문은 이 성스러운 기적이 여인으로 부터시작된 것이고, 예수님이 이 여인을 고치려면 이 여인과 신체적 접촉을 해야하고 만짐을 허락해야 하는데 그것을 허락하다 보면 예수님은 정결례를 ‘어겨야 하는 상황에 예수님이 처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합니다.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늘 경계 담벼락을 만드는 boundary maker 되어 수많은 율법을 만들어 경계선을 지키는 역할을 하여 회당 밖 병자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정죄하고 공동체에서 추방합니다.
바로 부자 청년이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이 바로 그가 경계선 만들기에 충실한 사람들이고 그가 무엇을 소유하고 갖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다가오는것을 밀어내고 경계선을 만드는데 충실하면서 이 바운더리 메이커 즉 경계선 지킴이가 되었음을 의미 하는 것 입니다.
경계를 넘어서는 (boundary breaker)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수뿐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boundary breaker로서 경계선을 부수고 넘고 가로지르고 행단하시면서 행동하시는 이것이 예수님과 신앙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예수님이 경계를 부수어 타인과 접촉을 시도하는 그 순간 바로 예수의 치유가 시작 되고 동시에 바로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 되는 것 입니다. 영어에서 고난이라는 말 즉 compassion 우리말로 자비, 사랑, 긍휼, 동정, 불쌍히 여김등으로은 번역되는데 열정”이란 뜻도 있지만 “고난” 또는 “수난” 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을 고치기위해 여인의 만짐을 허락하다가 이 만짐과 접촉을 받아 들임으로서 바로 정결법을 어기고 예수님이 compassion이라는 수난에 이르고 ‘이 “하혈병 걸린 여인의 수난에 함께 동참함으로서 그녀를 고치고 유대 율법의 낡은 구조악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혈병여인의 “개인의 질병 치료’는 (안식일 /율법 / 성전)이라는 유대 사회구조에 정면으로 저항하면서 십자가를 지면서 거기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기 시작하는 십자가의 치유(죄사함)의 능력이 여기서 이 만짐과 접촉으로 인한 정결례를 위반하며 함께 비를 맞는 이 compassion 즉 십자가로 부터시작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이 흔들릴 때 오히려 지역 협력자를 보내주신다.
항해 가운데 거라사광인, 하혈병걸린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이라는
지역 협력자가 등장하면서 끝내는 이방 땅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 나라 운동이 확산하는 이야기는 우리로 말씀의 힘과 공감과 위로를 경험하게 하였다.
우리 새롬교회에도 어린이집에 예○희권사님과 김○숙 권사님을 보내주셨다. 마을 도서관을 •세울 때는 엄○용전도사님을, 지역공부방에는 김○희권사님을 보내주셨다. 새롬교회의 초기 지역 선교 시절 하나님은 중보기도회때 김○자권사님, 최○정권사님, 마○임집사님을, 찬양대에 선○정 집사님을 •보내주셨다. 정○회안수집사님을 통해서는 협동조합 달나라토끼를 세워주시고, •이 일을 돕기 위해 이○훈 전도사님을 보내주셨다.또 코로나 이후 신나는 마을 어르신 사역에 정○영 집사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항해 내내 "헤롯과 바리새의 누룩"에 물든 제자들의 몰 이해로 갈릴리 바다를 빙빙 돌면서 이방땅을 넘지 못했지만, 그 이방 항해를 통해 만난 거라사 청년과 하혈병 걸린 여인을 지역협력자로 얻고, 특히 이방 시돈지역의 수루보니게 여인의 딸을 부스러기로 고쳐주는 사건을 통해 이방선교의 확신을 얻으시며 유대땅의 오병이어 사건을 이방땅에서도 4000명을 먹이시는 7병이어의 하나님 나라 급식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시며 이방선교를 완성시켜 나가 십니다.
제자들과 항해 이야기가 끝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수난받으러 올라가는 이야기 앞뒤에 맹인 치유 이야기를 배치한 마가의 의도와 율법을 잘 지킨 부자 청년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맹인 바디메오가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유를
살펴보면서, 재난 이후에는 누가 예수님의 제자로 다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1.십자가 형은 로마제국과 유대 종교권력이공모한 정치형이다.
•오늘 종려주일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이 시작된 한주간의 수난과 고난과 십자가에 매달린 사건 입니다. 이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우리가 풀어야할 몇가지 오해와 꼭 기억해야 할 몇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 중 첫번째 오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나의 개인 구원을 위한 대속 사건으로 축소한 오해 입니다
2, 우선 십자가 고난의 깊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제자들의 이탈, 배반 부인 도망등으로 인한 예수님의 심리적 고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찌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하는 로마 군인에 의한 조롱과 모욕과 멸시를 통한 고난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로마의 채찍과 십자가의 고통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 입니다. 로마의 십자가 형에 앞서 반드시 채찍질 형을 하는 것은 아닌데 예수님은 십가자형 앞에 채찍질 형을 먼져 받으십니다. 로마가 채찍형으로 쓴 채찍은 여러개의 가죽을 묶은 것으로 가죽 끝에 뼈조각과 납조각을 박아 이 채찍이 몸을 휘감으면 실핏줄이 터지고 나중에 동맥이 파열되고 살점이 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채찍형 이후에 있는 십가가형은 예수님의 몸의 무게를 손과 발에 박은 못으로 지탱케 하여 손과 발이 찢기고 한나절 하루와 같은 장시간 처절한 고통속에 죽어가게 하는 처형 방법 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가에 찾아간 여인들은 …16장 8절에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복음의 끝은 심한 공포감으로 무덤가에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영리 번영신학 vs 4.3, 전태일,세월호,성문밖마을교회
1980년대 대학 캠퍼스에 앉아 있으면 주로 ccc와같은 대학 선교회와 ubf와 같은 대학생 성서 읽기회 단체에서 이러한 선교 단체의 분들이 와서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전도하는 내용을 보면 주로 사영리로 하는 전도 입니다. 74년 빌리그래함전도대회 이후
활동하는 청년 선교단체 전도 청년들인데 그분들의 사영리전도를 듣고 있자면 이러한
사영리식 기독교 복음이해와 전도의 행태는 당시 광주에서 양민들이 학살당하고, 젊은 이들이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고 감옥에 가고 죽어나가는 삶과 사회적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 이었습니다,어떻게 이러한 신앙이 가능하였는가?
시대와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아무런 고민과 반성이 없는 오로지 개인의 구원에 몰두해 있는 신앙이었던 것 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영리의 개인구원과 예수님 믿고 성공하고 부자되는이러한 번영신학에 몰두한 결과 오늘 한국 교회는소금의맛을 다 잃고 검찰과 언론과의 동맹체를 이루어 가짜 뉴스의 양산하는 사회적 공신력을 다 잃어 버린 소금처럼 되어 오늘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게 된것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는 우선 십자가 고난의 깊이를 이해하면서•바른 십자가 신앙과 신학을 정립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사영리,삼박자구원,‘EXPLO’74’대회
사영리와 삼박자축복 교리는 ‘EXPLO’74’대회를 시발로 오늘날까지 한국 기독교 교회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정신이 됩니다 사영리란 성경66권에 나타난 구원의 원리를 네가지로 축약 시켜놓은 것입니다. 첫째 원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둘째 원리는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하고 영원한 형벌에 놓여있다. 세째 원리는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의 길이 열렸다. 네번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원리입니다. 이 사영리가 만들어진 것은 1958년 미국 CCC 수련회에 강사로 초빙된 세일즈맨으로 거부가 된 사람이 “성공적인 세일즈맨이 되는 지름길은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짧고 알기쉬운 그러나 눈에 띄는 선전 문구를 사용해야 한다. 고객에게 똑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그것을 잘 전할수록 성공적인 세일즈맨이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말에 감명을 받은 빌 브라이트 총재가 만든 것이 바로 사영리전도지라는 것입니다.
포도원 일꾼의 은혜와 환대의 경제학
먼져온자!! (불평) / 나중 도착한자!!(은혜경험)
하나님: 처음 온자와 나중 온자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 주는
기본임금(은혜와 환대)의 경제학 실현
예수님을 따르는 초대교회는 당시의 교회를 기존 성전이나 제단, 회당과는 다른 에클레시아를 선포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유대 종교에 갇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유대교와 같은 단순히 종교를 넘어 열방에 흩어져 세상을
담아낼 새로운 부대 요즈음 말로 새로운 마당이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성전과 회당에 대비되는 공간이 바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집인데 누가의 병행구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44.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 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하시니 49.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7:44-50)
엠마오로가는길!!!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시골로 도망을 갑니다.그런데 마침 그날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약 11킬로)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마을로 가고 있었다(눅24:13).”
그들이 따른던 예수는 힘없이, 무참하게 죽었다. 고문을 당하고, 온갖 능욕과 모멸을 받으며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제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뒤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끝도 모를 깊은 절망에 빠졌다. 예수를 따르던 이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참담한 실패였다. 그리고 베드로 등 몇몇 수제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제자들은 목숨을 보전코자 예수살렘을떠났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30.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31.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하고 "‘
“그대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참 무딥니다.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자기에 관하여 쓴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눅24:25~27)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법정에 넘겨주어서,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사순절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오늘 아무 죄 없는 예수는 죽이라하고 강도인 바라바는
풀어주라고 하는 이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나라의 사법부 의 현실과 많은 의로운 사람들이 오늘 이시대의 대제사장 가야바와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 의해 도륙을 당하는 이 현실 과 비교하면서 함께 주님의 십가가를 지며 깨어일어나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기도로 마치었습니다.
성경봉독: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하는 말씀처럼,지금 우리모두도예수님이 길에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또 빵을 떼실때 비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엠마오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부활사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김0자 권사: 어찌보면우리 새롬 공동체는 코로나 기간중에갈릴리 예수님께 처음 부름을 받아 마지막까지 함께한 제자들이 골고다 언덕 수난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하나둘
배반하고, 부인하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도망하는 모습 속에서 코로나 재난기를 겪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신앙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경험하며 코로나 재난의 한복판에서 함께 말씀을 읽고 선포하면서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들리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모두 : 그것은 처참히 무너지는 제자들의 비극적 상황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라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렇게 끝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운
질문에 마주 서는 것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과 씨름하면서 결국은 제자들의
배반, 부인, 도망은 사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기 위해 기존의 모든 것을 해체하는 과정이라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22부활절 대표 기도문) 주님 코로나 기간중우리의 대화도 끊겼고, 마음도 멀어졌고, 신앙도 약해 졌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대로 있고,코로나 시기를 잘 지켜온 교인들이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 모여 바닥을 청소하고, 화단에 꽃을 심으며, 부활의 희망을 이야기하기를 원합니다.우리의 지친 마음을 서로 위로하고 부활의 아침을 기다리는 새롬교인들 되게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정00 집사 꼽이심야식당;
그래 맞아! 오늘도 약대동마을에서는 마을 어르신들이 신신마로 세대공감에 모여 신나는 율동과 함께 냉면을 드시고, 약대동 청소년 꼽이심야 식당이 야외로 나가 밥상을 펴고,
함께 모여 마을 지도를 그리고 있어, 약대문예학당; 그리고 2023 여름 마을교사대학으로 모여 약대마을학교 주제는 "기후생태마당"으로 정하고, 10월에는 우리동네 줍킹 11월에는 마을음악회 & 자원순환장터 & 꼽이심야식당 9주년이 진행되는등 새롬 37주년의
감동을 계속이어가고 있고, 새롬지역아동센타: 새롬 20주년을 맞이하는 약대신나는가족도서관 축하행사에는 특히 새롬지역아동센타아이들의 축하공연의 감동이 있었어!!
신나는 어르신 마을; 그리고 올해 2024년도 설 주일은 공동의회 이후 신년예배부터 시작된 구역찬양출발과, 구역과 성서학당이 함께 준비한 사순절 구역 심방과 성서통독으로 힘차게 출발되고 있어!!
이00 : 그리고 정말 성령님의 도움으로, 예수님의 심판과 죽음 이후 하나님 나라 운동이 철저히 새롭게 시작되기 위해 예수 운동은 낡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해체한 후에야. 갈릴리 마을에서 다시 보자는 부활의 말씀이 우리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새롭게 울려퍼짐을깨닫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 코로나를 겪으며, 갈릴리 마을에서 다시 보자는 주님의 부활의 말씀을 우리 약대동에서는 “돌봄교회와돌봄마을로 다시 시작하라”라는부활의 말씀으로 들으며, 이제 우리는 새로운 부활의 교회와 마을을 꿈꾸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가자!! 갈릴리 마을로!! 약대동돌봄마을 돌봄교회로!!마당 ( 돌봄교회 돌봄 마을 마당극)
이00: 예수님이 부활후 어디서 나를 다시 보게 될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갈릴리에서 볼것이라고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약대동마을에서 부활이란 무엇 입니까?
김현자 00 성경낭독: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막16;7)
김00: 부활한 예수는 갈릴리 마을에 있다고 하셨어! 그러면 갈릴리란 어떤 곳이며 예수님은 갈릴리 마을에서 어떻게 부활하고 계신다는 것인가? 이보게 청년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마을에서 다시 보자고 하시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이야기 해 주실수있는가?.
김00. 우리 새롬교회와 약대동마을 사람들이 “건물에서 나와 마을의 집과 집을 연결하면서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서 장모를 고쳤을 때 온마을의 장모의 집 앞마당에 모였던 그 치유의 마당으로 부활 하신다는 것 같아요
한00 :중풍병자의 집에 용신할수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을 때,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서로 협력하여 친구를 들쳐업고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나서는 그 협동의 마당으로 부활하신다는 말씀 같아요
허00 : 그리고 알패오의아들 레위의집에서 처럼 죄인들과의밥상공동체로 안식일날
“무거운 짐진자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면서 •손이 마르고 위축된 사람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돌봄과 치유의 마을로 다시 부활하라는 말씀인 것 같아요!!
주님! 이제 거리두기를 과감하게 해제한다는 코로나 시대의 종식의 소식이 들려오는 부활의 아침 입니다. 주님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과 초유의 대통력 탄핵이라는 사태와 촛불시민의 등장과 촛불이후 디지털과 한류가 등장하고 한국이 선진국의 진입하고 한국 문화와 부흥하는 대한민국을 경험하며 선진국으로 진입이라는 희망에 들떠 있었습니다.
지난 촛불의 시기에 우리도 마을로 내려온 촛불과 마을에서 만나는 예수의 꿈을 꾸었고, 2020년 코로나가 들이 닥치면서 새롬교회 30주년 그 전후의 시기 생태문명에 대학 각성이 있었고 우리 약대동 마을은 코로나 시기 돌봄마을에대한 관심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재난의 시기가 진행되는 동안 불평등과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었고, 2022 대선을 중심으로 언론 검찰 부동산 극우 대형교회와 사이비 이단이 카르텔을 만들며 다시 어둠의 권세가 힘을 얻어가면서 우리 모두는 오늘 엠마오로도망가는 제자들 처럼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 코로나 기간동안대화도 끊겼고 마음도 멀어지고 믿음도 약해져 갔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도 엠마오 가는길 내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떡어떼어 주시는 부활한 주님을 만날수있었습니다. 주님 이 부활의 아침 우리가 주님께 감사드리옵는것은교회는 그대로 있고 코로나 시기를 잘 지켜온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고난주간에는 모두 교회에 모여 바닥을 청소하고 유리창을 닦으며 화단에 꽃을 심으며 부활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우리의 신앙을 함께 더욱 굳세게 다졌습니다.
주님 지난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는 요한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후 100년이 지나자 단순히 고난과 수치와 모욕이던 십자가가 요한복음에 오면 영광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재 해석되고 있는 놀라운 요한 복음의 신앙고백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제 선거후 오히려 새로운 부활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30의 여성들이 일어나고 있고, 직접민주주의, 마을대학등 새로운 부활의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 약대동마을에서는 건강리더 환경 생태리더 그리고 문화리더들이 봄에 새싹이 돋듣 푸릇푸릇 다시 부활로 일어서고 있습니다.
다같이) 주님 부활의 아침 엠마오가는길에 오히려 부활의 예수 만나뵙고 돌봄마을과
생명망 목회로 부활을 기대하고 있사오니 "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히브리서 10:25절 말씀 처럼 부활의 공동체로 다시 일어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우리 사회는 저출생, 고령화, 다문화 사회의 진입, 빈부 격차의 심화 등으로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그룹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2024년 3월 정부는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돌봄통합지원법)’을 제정했다. 우리 사회에 ‘돌봄’이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든지 타인의 돌봄을 받을 상황에 놓인다. 시민사회 구성원으로 돌봄이 필요할 때, 누구라도 공동체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진정 건강한 사회이다. ‘누구나 돌봄’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전반적인 돌봄을 받을 권리를 의미한다. 결국 건강하고 행복한 지역사회 실현을 위해 우리 사회가 나아갈 핵심 과제로 ‘돌봄마을’이 부상하고 있다.
공적 돌봄(국가의 실패)과 사적 돌봄(시장의 실패) 사이에 마을공동체 중심의 돌봄마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2045년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 인구의 37%로 일본을 넘어 세계 최고령 국가가 된다. 초고령사회 진입에 대비해 지역사회 통합돌봄이 조속히 마련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주거-의료-복지-돌봄 간에 유기적인 협력이 시급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웃을 돌볼 시민사회의 돌봄역량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황이다. 국가는 공적 돌봄이 감당할 수 없는 돌봄의 공백을 시장경제에 맡기고 있다. 하지만 시장의존형 돌봄은 온전한 해결책이 아니다. 가족과 마을에서 함께 사는 이웃이 제공하는 안전한 돌봄 공간이 있는 ‘돌봄마을’의 구현이 절실하다.
이에 따라 돌봄마을의 지향점은 다음과 같다.
하나, 우리는 부천시민 모두가 생애주기에 따른 차별 없고 안전한 돌봄체계와 환경 가운데 살아가도록 통합적 돌봄공동체인 민·관 협력체를 구축한다.
하나, 우리는 아동·청소년이 차별 없고 안전한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마을돌봄과 안전망을 마련한다.
하나, 우리는 이주민들이 지역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살아가도록 다양한 지원과 이를 뒷받침할 돌봄체계를 구축한다.
하나, 우리는 장애를 이유로 제한·분리·배제·거부 등을 할 수 없고 지역사회에 베리어프리(barrierfree) 환경을 구축하고 장애인을 위한 편의와 돌봄공동체를 마련한다.
하나. 우리는 노인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돌봄을 받으며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생애를 정리할 수 있도록 공동체적 통합돌봄체계를 마련한다.
하나. 우리는 동(洞) 단위의 통합돌봄 전담조직들이 지역에 돌봄·의료 등 여러 조직들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촘촘한 돌봄지원망을 구축한다.
하나. 부천시는 마을공동체가 마을돌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민관협력의 모범이 될 것을 요청한다.
부천은 이미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이 마을돌봄 현장에서 여러 돌봄의 실재를 이뤄가고 있다. 이제 돌봄통합지원법이 시행을 1년 6개월 앞둔 지금이 부천시가 통합돌봄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할 적기이다.
오늘 우리는 부천시민 누구나 돌봄의 필요가 있을 때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와 함께 지역공동체의 돌봄권을 보장하기 위해 지자체와 협력하여 마을돌봄에 적극 참여해 마을돌봄시대를 열어 갈 것을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