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년간 아무도 가지 않던 길을 가던 김종철 선생님이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이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너나들이를 하는 친구지만 나는 늘 그를 스승으로 존경해왔다.
'200년 전에 노예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100년 전에 여자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50년 전에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테러리스트로 수배 당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여도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는 계속 발전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대안이 무엇인지 찾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안정숙 선생님 페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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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선생은 1991년 주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월급을 털어 <녹색평론>이라는 격월간 잡지를 대구에서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26년 전의 일이지요. 화석연료의 고갈에 대비한 탈원전 에너지 정책, 기업농이 아닌 소농 중심의 농업, 수돗물 불소화 반대, 기본소득제 도입, 대의제 민주주의를 대신할 숙의민주주의 등 그가 제기했던 낯선 의제들은 어느덧 친숙한 개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제들은 아직 현실적인 정책으로 정착되지는 못했습니다. 녹색당도 아직 정치적 기반이 허약한 소수정당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녹색평론>이 제시하는 대안은 언젠가 현실이 되고 생태학적 상상력은 언제나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에너지원이 될 것입니다.
김종철 선생은 날카로운 필치와 예지력을 가진 논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시를 사랑하고 아끼며 시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구원하려는 순정한 문학청년의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1999)을 보십시오.
1978년 평론집『시와 역사적 상상력』이 출간되기까지도 김종철 교수가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는 드물게 민감한 감수성과 유연하고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인하여, 그리고 당시만 하더라도 문학비평을 전업으로 하는 문필가의 숫자가 적었던 탓에 그는 언제나 주요평론가들 중 한 명으로 거명되었다.
그의 글의 매력을 기억하는 독자들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평론집 출간 이후 그의 평론을 대하기는 더욱 어려워졌고, 저 요란했던 1980년대에는 그는 거의 문단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처럼 보였다. 그동안 그의 관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던가. 1991년부터 그가 편집발행하는 격월간지『녹색평론』이 이에 대한 답변이다. 이 잡지의 편집을 통해, 그리고 틈틈이 발표하는 글을 통해 김종철 교수가 해온 일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문학평론의 통상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어떤 근본적인 운동에 관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다르게 생각하면 문학행위의 존립근거 자체를 문제삼는 가장 본원적인 문학활동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 거의 동시에 출간된 두 권의 책에 그 동안의 글이 정리됨으로써 우리는 오늘의 지구적 상황에 대한 김 교수의 사색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자세를 점검할 모처럼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김 교수의 책 자체가 체계적인 저술이 아니듯이 이 글 역시 본격적인 서평은 되지 못한다.
저자 스스로 말했듯이『간디의 물레』는 어떤 체계적인 또는 이론적인 저술이 아니라 “지난 8년간 격월간『녹색평론』을 엮어내는 동안 틈틈이 쓰거나 말했던 기록들을 모아서 묶어낸”(⌈책머리에⌋) 책이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 말은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바로 표제의 글인 ⌈간대의 물레⌋를 비롯하여『녹색평론』창간 이전에 발표된 글도 서너 편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 뒤에 붙은 발표연도를 살펴본 독자들만이 그 사실을 눈치챌 만큼『간디의 물레』는 집요한 ‘녹색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앞서 체계적 저술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학술서적 같은 외면적 내지 형식적 체계를 결하고 있다는 뜻일 뿐이다. 한 권의 책에 저자의 통일된 관점 혹은 한결같은 문제의식이 외곬으로 숨쉬고 있을 경우 그것을 일종의 내면적 체계라 불러도 좋다면,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내면적 체계를 가진 책이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김종철 교수의 입장은 이른바 생태론적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변주되는 사상의 핵심은 아마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 잘 농축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만물은 나의 형제이다.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의지나 욕망 때문에 이 세상의 삶을 향유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내 능력으로 는 헤아리기 어려운 깊고 거대한 근원적인 생명충동이며, 그 충동은 자연의 심층에 내재 되어 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반딧불이나 할미꽃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 과 같은 힘. 같은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반딧불과 할미꽃의 소멸은 인간도 얼마 안 있어 사라질 것임을 예고해준다. 인간은 수십억 년에 걸친 생물진화의 긴 과정에서 가장 섬세 하고 복잡한 지성과 자의식을 갖춘 존재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다른 생명체 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한 것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책임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인간은 본래 흙에서 나왔으므로 어떻게 보면 우리 각자 는 움직이고 말하는 흙이나 바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누구도 인위적인 변경을 가할 수 없는 타고난 인간조건이며 운명이다. 그런데 산업기술문명은 이런 근원적인 인간 조건을 무시하도록 강요한다. 여기에 우리가 일상 경험하는 삶의 폭력성과 문화의 극단적 인 퇴폐의 근본원인이 있는 것이다.(26쪽)
거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떨림과 확신 속에 아름답게 표명된 이와 같은 ‘생태학적 감수성’(38쪽)에 기초하여 볼 때, 생태계의 손상은 단순한 외부적 재난이 아니라 지구생명 전체의 총체적인 위기이자 인간성과 인간문화의 근본적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논의의 이 출발점 자체가 극히 논쟁적인 것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라는 즉물적 사실에만 시야를 제한하고 그것의 지나친 확대해석에 반대하는 일종의 객관주의적 입장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만물은 나의 형제이다”라는 언명은 종교적 심성의 표현일지언정 객관적 사실의 진술일 수는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서평을 쓰는 동안 신문에 보니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세계 식물학자들의 모임인 국제식물총회(IBC)가 최근 80개국 4천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연례회의를 열고 보고서를 채택했는데, 이에 의하면 지구상 30만 종의 식물 중 이미 5만 종이 멸종위기에 놓여 있고 앞으로 25년 동안만 현재와 같은 추세로 자연환경의 파괴가 계속된다면 21세기 말에는 20만 종이 사라질 것이라 한다. IBC는 이어서 “식물이 멸종되면 필연적으로 동물의 멸종이 뒤따르게 될 것이며, 동물도 향후 100년간 3분의 2 가량이 멸종할 것”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동아일보』,1999년 8월 11일자) 이러한 경고를 발한 식물학자들의 관점이 신문기사에 암시되어 있듯이 단지 열대우림의 파괴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수준의 것인지, 아니면 김종철 교수가 생각하듯 현대 산업문명의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요구하는 것인지 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김 교수의 감성에 의한다면 식물학자들의 경고는 나와 내 자식에게, 즉 우리 인간에게 미래가 암담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또 하나의 증언이다.
어떻든 『간디의 물레』 어느 곳을 펼치더라도 우리는 오늘의 지구문명이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일종의 근본주의적 진단을 읽을 수 있다. 이 위기는 김 교수가 보기에 종래와 같은 관습적인 대응이나 기술주의적 처방으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자본주의 경제가 인간생활의 진정한 필요가 아니라 이윤추구를 근본동기로 하는 만큼 그것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적⦁폭력적 관계를 한없이 강화한다는 것”(35쪽)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의 대안적 체제라고 자칭하는 사회주의가 이에 대한 해결책인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주의는 산업화의 과실을 공평하게 분배하자는 것이었지. 산업사회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소련이나 동구의 사회주의는 물질적 발전이 서구보다 뒤떨어진 조건에서 생산력의 증대와 과학기술의 발달을 정치적 강제에 의해 추구했기 때문에 생태학적 재난이 더욱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오늘의 지배적 문명, 즉 산업기술문명을 김 교수는 스웨덴의 노벨상 수상자 알프펜(Alfvén)의 명명에 따라 ‘거대한 집단자살 체제’(7쪽)라고 부르고 있다. 집단자살이란 낱말이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지구가 유한한 체계임을 인정하는 한 이것은 현대 산업문명의 본질을 정확하게 찍어낸 표현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한편으로는「‘국제화’의 재앙」이라는 글에서 질문자가 물었듯이,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인류역사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그러면 이게 어디서부터 이렇게 어긋나기 시작했을까요?”(102쪽)라고 물어가면서, 다른 한편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활로’(83쪽)가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이 지구적 위기의 뿌리는 무엇인가? 이 책의 여러 곳에서 김 교수는 최근 2,3백 년에 걸친 서구 산업기술문명 내지 산업적 생활방식의 확산을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산업주의 문화 자체도 평지돌출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전개과정의 결과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김 교수 자신도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에 관한 루이스 멈포드의 설명을 상기하면서 “인간사회에 불평등한 계급구성이 시작되고, 사람이 타자를 자신의 권력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오늘의 위기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76쪽)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따지고 들다 보면 인류문명의 발생 자체를 문제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비록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글을 읽고 쓰는 생활에는 본원적으로 인간이 자연과 공동체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일종의 소외작용이 불가피하게 개입한다는 사실”(252쪽)에 대한 언급을 읽으면, 이 서평을 쓰는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김 교수도 인류사의 지배적 문명 내지 인간사회의 주류문화에 대해 깊은 반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삶의 자연적 기반이 붕괴된 것이 최근 수백 년간의 급격한 산업화 때문인지 또는 문자의 발명과 같은 문화생활의 영위가 이미 생태적 파손을 필연적으로 예감케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세계관적 토대가 데카르트 같은 사람의 기계론적⦁이분법적 우주관인지 또는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서 희랍과 중국 고대의 합리주의 철학부터인지 그것은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어쩌면 여기에는 어떤 정답도 있을 수 없을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인류역사가 어디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냐는 물음에 “아직 제 실력으로는 도저히 해명할 수 없고… 종래에는 산업혁명 이후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흔히들 얘기해왔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더 근원적인 것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102쪽)라는 김종철 교수의 대답이 아주 솔직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생각의 차원에만 관련된 문제, 즉 그냥 넘어가도 좋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산업화로 가는 방향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던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오늘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일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면 기술적⦁산업적⦁사회적 발전이 자전거의 발명과 보급까지만 허용하는 수준에서 멈출 수 있는가, 아니면 거기서 더 나아가 자동차의 발명과 대중화로 진전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도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한 가지 상기할 만한 사실은 자동차의 대중화가 뒤늦게 시작된 우리나라가 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자전거의 보급률도 훨씬 낮다는 점이다. 중국보다도 낮고 멕시코나 인도네시아와 비슷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천민적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산업화의 재난에 더 치명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인류공멸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활로를 찾는 일에서도 김 교수의 방안은 철저하고 근본적이다. 그가 보기에 “산업문화의 공식적 기구와 제도를 통해서 생태적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원리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이 산업주의 문명에 기본골격을 그대로 두고, 여기에 부분적인 수선을 가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진짜 위기”(83쪽)이다. 유일한 활로는 “거룩한 것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고, 오랜 세월 축적된 삶의 기술과 지혜가 보존되고, 무엇보다 사람이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는 분위기가”(34쪽) 있었던 산업화 이전의 토착문화의 원리를 부활하는 것이고, “땅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와 자립성을 토대로 하는 삶의 패턴을”(210쪽) 근원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절제된 가난의 삶”(135쪽)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재간이 뛰어나고 과학기술의 능력이 아무리 향상된다 하더라도 지구라는 유한체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한, “내핍과 절약과 가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에 있어서는 항구적인 생활방식일 수밖에 없다.”(134쪽) 생명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문화를 재건하자면 “우리 각자의 인간적인 자기쇄신”(19쪽), 즉 일종의 개종(改宗)에 맞먹을 만한 “의식의 대전환”(37쪽)이 있어야 한다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개인 차원에서나 인류사회 전체로나 이러한 근본적 전환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멀리 갈 것 없이 우선 나 자신이 나의 일상생활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가? 가령 개인자동차를 버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자동차 하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김 교수의 글에서 자동차가 “부분적인 합리성과 전체적인 비이성의 결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기술”(137쪽)로서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자동차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산업체제와 생활구조의 유기적인 일부분이다.
예컨대 우리의 주거문화에 대해 생각해보자. 며칠전 정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아파트가 생겨난 지 40여 년 만에 드디어 단독주택보다 더 많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단독주택이라는 것도 옛날과 달리 전기⦁상하수도⦁가스⦁전화선⦁인터넷 등을 통해 철저히 외부공급에 의존하는 구조로 변했지 결코 자생적 공간이 아니다. 이제 자동차도 어느 정도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 주택은 더욱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에서 대량소비와 환경파괴가 구조화된 거대체제에 갇혀 있는 것이다.
얘기가 되풀이되지만, 나는 김종철 교수의 현실진단과 대안구상이 얼마나 정확하고 적절한지 판별할 능력이 모자란다. 내심 깊은 공감을 느끼는 경우에도, 마음속 더 깊은 곳에서는 단지 공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의 생활 속에서 실제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공감의 무책임성에 힘이 빠진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김 교수가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지 모른다”(7쪽)고 고백한 말의 진실성이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내용이 진리인지 비진리인지 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최대의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조금의 의심 없이 믿는다. 그런 점에서『간디의 물레』가 우리에게 발휘하는 호소력의 근원은 과학적인 것이라기보다(과학은 거짓이 없고 실패가 없다는 생각은 근거 없는 미신이라고 그는 말한다.─16쪽) 말하자면 문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디의 물레』가 다양한 화제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김 교수의 또 다른 책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 교수인 저자의 면모를 좀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책의 제1부는 세 편의 강연과 한 편의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담도 대등한 토론이 아니라 짤막한 질문과 긴 답변으로 되어 있어, 강연의 성격이 짙다. 이 대담은 가장 최근의 것일 뿐더러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해 마음 편하게 의견을 털어놓고 있어, 김 교수의 요즘 생각을 알기에 적합하다. 제2부는 네 사람의 시인에 관한 본격적인 문학평론이다. 제3부는, 앞의 대담에서 김 교수가 “예전에 좀더 젊었을 적에 나는 미국 흑인에 대해 관심이 꽤 있었어요. 미국 흑인의 문명은 제3세계의 억압받는 모든 민중의 전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제국주의적 착취,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 자본과 노동의 갈등 같은 문제가 늘 시야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어요”(139쪽)라고 말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 입장에서 쓰여진 문학론과 문화이론이다.
제1부의 강연에서 대체로 우리는『간디의 물레』에서 읽은 견해와 관점이 되풀이 개진되고 있음을 들을 수 있다. 좀 색다르다면 생태적 감수성을 시적 감수성, 시의 마음에 연관시키는 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김 교수의 개념이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지금 중요한 것은 문학형식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시적 마음”(60쪽), “시적 사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생명을 하나로 보는 사고방식”(61쪽)이라고 할 때의 시는 특정한 문학장르를 지칭한다기보다 생명의 활동성에 대한 포괄적인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모든 분야에서 상업주의가 압도하고 소설이 사멸의 길로 접어든 현실에서 “시에 대한 욕구는 더욱 강렬해질지도 모른다”(119쪽)고 할 때의 시는 분명히 특정장르에 한정된 개념이라고 할 것이다.
영화나 텔레비전 같은 영상문화가 판을 치고 각종 대중문화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게 된 오늘 시와 소설의 운명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지, 또 문학의 앞날이 어떠할지 우리 문학 전공자들로서는 심각한 관심거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소설장르가 19세기 서구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문화생활에서의 중추적 역할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간의 삶에서 오랫동안 문자가 차지해왔던 독점적 지위에도 근본적인 동요가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문자의 발명, 문자생활의 시작을 인간사회에서의 착취와 지배관계의 발생과 연관짓는 김종철 교수의 입장에서 볼 때 문자문화의 쇠퇴현상이 반드시 아쉬운 것만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의 논리와 기술공학의 원리가 삶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게 된 상황에서 시가 과연 이러한 상황에 맞설 만한 대항체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고 맡은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의문이다.
이 책의 제3부에 실린 글 중 가령 ⌈이야기꾼의 소멸⌋같은 것은 1977년에 발표된 것으로 되어 있다. 가장 긴 논문인⌈역사, 일상생활, 욕망⌋에는 1984년이라는 연도가 붙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쓰여진 글들인데, 미학적 인식과 문학적 표현의 여러 문제점들을 사회적⦁역사적 실천에 결부시켜 논술한 뒤의 논문은 나에게 특별한 감회를 자아내게 한다. 김 교수도 유물론적 문학관에 깊이 침윤된 적이 있었음을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체질적으로 공식주의⦁교조주의에 대해 저항적이다. 그는 말한다: “문학과 예술의 일차적인 요건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이와 같은 힘은 메마른 추상적 진술로써 절대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학에서 비근한 일상적 체험이 중시되고 사람의 정서적 경험이 주목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255쪽)
그러나 이 당연한 상식이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상식의 눈으로만 작품을 읽어서는 도대체 문학비평가가 될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상식을 벗어난 이상감각이 예술성의 보증으로 통용되는 풍토는 더욱더 문제이다. 어떻든 김종철 교수의 생태학적 세계관은 한편으로는 시인의 마음이라고 할 만한 여리고 민감한 감수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으로서, 그러나 다른 한편 맑스주의라든가 유물론과 같은 일종의 사회과학적 사유와의 교류와 길항의 결과로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제2부에 실린 네 편의 시인론과 제3부의 ⌈산업화와 문학⌋은 추상적인 이론전개가 아니라 실제의 작품분석을 통해 이론을 구체화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이 글들에서야말로 다른 사람이 쉽게 대신할 수 없는 김 교수의 뛰어난 능력이 발휘되는 것 같다. 원래 추상적 이론이란 자칫 논리적 자기충족의 유혹에 빠져 공허해지기 쉽다. 구체적 대상과의 실천적 접촉을 통해서만 이론은 살아 있는 무엇인가로 될 수 있다. 더욱이 문학평론에 있어서 작품분석은 추상적인 이론체계가 단순히 텍스트라는 대상에의 적용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과정이 아니라 이론이 자기존재를 획득해 가는 본연의 자리이다. 무용가의 몸에서 무용을 따로 떼어낼 수 없듯이 작품을 읽고 느끼고 감상하는 일에서 문학이론을 분리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개인의 진실한 느낌과 정서적 경험을 중시하는 김 교수가 작품을 앞에 놓고 뭔가 얘기하는 글, 즉 본연의 문학평론을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이상한 일이고 또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기다.
맛있는 음식이 빨리 없어지는 것이 그렇듯이 재미있는 글이 빨리 읽어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용악⦁신동엽⦁이선관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아쉬움을 느낀다. 전에 발표될 때 읽은 것을 다시 읽는데도 그렇다. 특히⌈시의 구원,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무명의 동향선배 이선관에 관한 글은 구원이라는 낱말, 아름다움이라는 낱말로써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를 비평적 문장 안에서 구현하고 있다. 이제 이선관 시인의 고달픈 삶과 소탈한 문학은 김종철의 아름다운 해석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역사화되었다. 그러나 역사화에도 불구하고 이선관의 시와 김종철의 비평은 위압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굽어보는 것이 아니라 지치고 낙담에 빠졌을 때 위로받기 위해 달려가고 싶은 고향의 품처럼 거기 그대로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원이란 ‘자주적인 사고에 투철한’(210쪽) 사람들끼리의 만남에서 오고, 아름다움이란 ‘사람살이의 본래적인 존재방식’(220쪽)이 자신에게 합당한 언어를 찾을 때 이루어짐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