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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우리 마을 이야기: 지역사회 생태계 살림과 회복

마을이 꿈을 꾸면..

by 아름다운 마을 2017. 10. 28.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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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우리 마을 이야기:

지역사회 생태계 살림과 회복

김도일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Ⅰ. 서론 : 인간 욕망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현대는 욕망의 시대이다. 끊임없는 욕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쉼 없이 무언가를 갈망 하고 쟁취하도록 부추겼다. 이런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고 싸우며 살게 하였다. 그러니 인간은 욕망으로 인하여 죄 를 짓게 되었고, 죄를 지은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생명과학 자 양재섭은 『생명을 나누는 타원형 교회』에서 린 화이트(Lynn White, Jr.)의 “생태 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 Science 지)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인용하면서, 현재 인류가 당면한 생태학적 위기의 주범이 바로 기독교라고 고발하였다. “기독교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길을 열어주었는데, 기독교 문화가 서양 문화를 지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연 파괴가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 1) 창세기 1장 28절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 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을 오해 한 오늘 인류의 선배들과 오늘의 인류는 생태계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개발하 여 지배하는 탐욕을 가져도 좋다는 허가서를 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만물을 가꾸고 보존하는 생태감수성”을 가져야 하며 최선을 다해 관리하고 보살 피라는 의미이다.
1) 양재섭, 『생명을 나누는 타원형 교회』(서울: 바이오사이언스, 2012), 31.




생각해 보면 기독교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인류와 피조물의 상태를 망쳐놓은 이면 에는 성경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오역하여 자기욕망 충족의 근거로 삼았던 데에 있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마음대로 부려먹고 노예로 삼았던 성경적 근거는, 노아 의 세 아들, 셈, 야벳, 함의 이야기에서 자신들은 셈 족속이고 흑인들은 함 족속의 후 예이며 함이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려주지 않은 이유로 함의 아들 가나안 족속이 자손대대로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적지 않은 백인 설교자들은 창세 기 9:22~27의 성경 이야기를 근거로 삼아 노예 소유의 정당성을 역설해 주었던 것이 다. 2) 유럽의 노예상들이 아프리카 전 지역에서 4000만명에 가까운 노예를 잡아다 가 나의 노예성을 중심으로 하여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에 팔아먹었던 노예상들의 장삿속 을 채워준 이면에는 검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하얀색 피부를 가진 사람의 종이 되어 야 한다는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마음대로 써먹은 결과라고 하겠다. 역겹게도 노예들 을 집결시켰던 지하 노예성, 엘미나 성 (Elmina Castle)의 위에는 목사관과 채플이 있다. 슬프게도 오늘날에도 수많은 흑인들은 이런 잘못된 관념으로 인하여 오해를 받 고 있으며 인종차별로 인하여 희생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일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나 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200만 명에 육박하는 다문화민족이 거주하는 우리나라의 국민들 가운데, 특히 기독교인조차 우리나라보다 경제적 수입이 적은 나라의 민족들을 업신여기고 차별하는 풍조가 아직도 있음을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하여 확인하고 있 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피조물의 하나님 즉 만물의 하나님이시며, 어떤 사 람도 다른 사람의 위에 군림하여도 좋다는 말을 하나님은 하신 적이 없다.
2)   노아의 저주는 “가나안 사람들이 왜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은 삶을 살아야 하며 왜 그들이 하나님께 심 판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땅을 내어주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원인론적인 성격의 본문 … 결 코 흑인종이 백인종의 지배를 받아 마땅하다고 보는 식의 이론을 정당화시켜주는 본문이 결코 아니다.” 라고 강성열은 적었다. 강성열, 『현대인을 위한 창세기 강해』(서울: 한장출, 1998), 108.

정의, 생명, 평화와 같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원하는 기독교적 보편가치는 망각한 채 로 인류는 물질만능주의와 극도로 치닫는 욕망 채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생명을 살리 기보다는 생명을 죽이는 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우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연 파괴의 주범 중의 하나인 석유 산업, 플라스틱 제품의 무분별한 개발, 심지어는 유전자 변형 식품(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과 농산물을 개발하여 지구 상의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인간의 돈과 지배에 대한 욕망 (greed)이 도사리고 있다.

Ⅱ. 생태계 살림과 회복의 원리는 타원형교회 원리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회론으로부터

앞서 인용한 양재섭은 오늘의 사회는 마치 두 원이 서로 중심점을 차지하기 위해 대 립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대립과 경쟁의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서는 원형 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중심을 빼앗으면 다른 사람은 주변에 서 맴돌 수밖에 없으므로 호시탐탐 중심을 차지하고자 기회를 노리게 되는 피곤한 사 회가 된다는 것이다. 양재섭은 원형적 사고에서 타원형적 사고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 다. 타원(ellipse)은 두 정점에서 거리의 합이 일정한 점의 자취이고 초점이 둘이기 때 문에 대립적 입장에 있는 두 요인을 모두 포용할 수 있으며, 거리의 합이 일정하기에 한 쪽이 모자라면 다른 한 쪽으로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 하고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공동체를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그 는 여자와 남자, 자연과 인간, 장애인과 비장애인, 생산자와 소비자, 교육자와 피교육 자, 정치가와 시민 등이 서로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서로를 살리고 세워주는 데에까지 갈 수 있다고 말한다.3) 타인을 죽임으로써 내가 살 수 있다는 무한 경쟁, 투쟁, 전쟁의 개념을 버리고 상호존중, 상호세움, 상호살림의 원리를 추구해야 하나님의 뜻을 인생 가운데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재섭의 타원형 아이디어는 섬김과 나눔의 삶이라 는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유용하다. 지배보다는 섬김, 쟁취보다는 나눔을 강조하는 삶 의 양태는 이 땅의 생태계를 생명, 정의, 평화의 정신으로 가득하게 할 것이다.4)




<그림 1: 원형 아이디어와 타원형 아이디어의 비교도>5)

3) 양재섭, 『생명을 나누는 타원형 교회』, 66-67. 4) 양재섭, 『생명을 나누는 타원형 교회』, 67. 5) 양재섭의 타원의 형성과정과 타원형사회의 예시를 참고하라. 위의 책, 66.

삼위일체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περιχw¾ ρησιj)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 님이시다. 이는 상호내주(相互內住), 상호순환(相互順換), 상호의존(相互依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며, 마치 우리 전통에 강강술래를 하듯이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 면서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마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요 10:38)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 의미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생태 계를 회복하고 살리는 비결은 삼위 하나님께서 상호간 교제하시면서 내주, 순환, 의 존하는 원리를 생각함으로 이해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오늘날 망가진 생태계 회복 을 시작하는 출발점은 어디인가를 생각할 때, 각 개인이 존재하는 가정을 생각할 수 있 다. 그리고 가정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로 살아나게 되면 가정들이 모여 하나님이 불러내신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에서 생태계 회복의 힘이 회복되게 되고, 지역사회 즉 마을에 존재하는 교회가 마을 속에서 원형적 경쟁과 압박과 착취로 사그라져가는 마을 사람들이 열린 교회, 메시야적 교회라는 마당(플랫폼)에서 회복을 맛보게 되고 하나가 되어간다. 바로 이것이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말하는 열린 교회, 세 상에 관여하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세상의 변혁에 힘쓰는 교회의 모습 이다.6) 하나님은 인간과 온 세상을 만드실 때 서로가 상관없는 존재로 만드셔서 서로 가 서로를 물고 뜯으며 서로를 지배하려고 애를 쓰게 만드시지 않으셨고, 오히려 서로 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고 서로를 세워주게 하려고 온갖 피조물을 만드셨다. 하나님 자신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 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고 하시며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인정하고 상호간에 존중하며 의지하는 가운데 창조의 사역을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계 살림과 회복의 원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외딴 섬처럼 세상을 전도만의 대상으로 객체화하거나 대상화하는 것에서 벗어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 활하시어 모든 피조물을 위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메시야 적 삶의 스타일을 가진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라고 몰트만의 신학을 이형기는 강조 하였다. 이 메시야적 삶의 구조는 “하나님의 주권의 성취와 하나님 나라의 선취”를 의 미한다. 즉 현대인들을 무감각, 무감동의 늪에서 건져내어 내 생명이 아니 다른 이의 생명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품고 고통의 짐을 함께 짊어질 각오를 하는 것을 의미한 다. 이웃에 대해 온갖 질고를 자발적으로 지고 가기로 작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헌신과 고난에 동참할 것을 서약하며 살아가는 메시야적인 삶의 양식을 의미하 는 것이다. 또한 나보다 어려운 입장에 처해있는 장애인과 난민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 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도우며 상호의존하는 관계로 나아갈 것을 각오하는 삶의 양태 로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타인에 대하여 열린 우정과 열린 마음으로 대하 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에큐메니칼 정신을 갖고 대하며,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교회”임을 인정하는 몰트만의 주장은 일리가 있 다고 이형기는 본 것이다. 7) 하나님 백성의 교회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 이며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아니 작게 표현하여 마을을 타자화하거나 객체화하여 전도 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으로 알아 “선취적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처신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을을 오직 복음화해야 할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 가 될 곳으로 예상하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복음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데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을 요약하면서 이형기는 하나님 백성의 교회가 정체성 (identity)과 적실성(relevance)을 찾아 교회가 무엇인지(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지) 와 교회가 마을에서 어떻게 처신하여야 하는지(하나님의 백성이 세속사회에서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행동해야 함을 강조하였다.8)
7) 이형기, 『교회론의 패러다임 전환』, 640-659. 8) 이형기, 『교회론의 패러다임 전환』, 672 이후.

Ⅲ. 우리 교회, 우리 마을의 생태계 살림과 회복

인간의 멈추지 않는 욕망을 인지하고 생명을 죽이기보다는 생명살리기에 온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기로 헌신의 맹세를 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힘써 연구하고 그 진의를 파악하여 헛된 탐욕 을 채우기 위하여 말씀을 이용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그리 고 목회 현장에서 원형 아이디어를 적용하여 자신이 늘 중심에 서 있어야 직성이 풀리 는 유아기적 경쟁 심리와 욕심 채우기식 삶의 양태에서 벗어나 나와 너, 장애 없는 이 와 장애 있는 이,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흑인종과 백인종, 한국 사람과 비한국 사 람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하고 서로가 서로 속에 존재한다는 성숙하고 열린 마음 자세와 삶의 양태를 갖겠다는 시각을 견지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무엇보다 교회는 하나님 백성의 교회임을 인지하고 하나님 백성이 태어나 함께 뛰어놀고 자라고 함께 늙어가는 마을 사람들과 조화로운 삶을 살 겠다는 의지와 신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뜻 없는 경쟁으로 피곤하고 허전하여 삶의 목표와 의미를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 님을 알고 만나고 그분과 함께 마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살아갈 수 있도 록 신앙적 조우의 살아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앙의 경험”의 마당(플랫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을은 하나님의 ‘선취적인 나라’가 된다. 그러 므로 교회는 마을사람들의 놀이터, 만남의 장소가 되고 마을의 매일 교회로 확장되어 감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어지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시각으로 지역 사회 즉 마을을 바라볼 때 우리의 제목인 우리 교회, 우리 마을이라는 제목은 매우 신학적으로 타당하고 실제적인 삶(신학과 삶이 분리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에서도 자연스럽다. 
우리 교회가 우리 마을을 이루어 개인, 가정, 교회, 마을의 건강한 생태계를 회복하 고 이루어 인간공동체를 살리는 일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세 교회의 교육 모형을 『다음세대 신학과 목회』라는 책에서 밝힌 바 있다. 첫째 교회는 송악감리교회이고, 둘째 교회는 부천새롬교회이며, 셋째 교회는 한남제일교회이다. 세 교회의 모형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다. 송악감리교회는 전형적 인 농촌교회로서 마을의 교육생태계와 경제생태계를 복원한 경우이며, 부천새롬교회 는 전형적인 빈자들의 도시 외곽교회의 경우로서 30년 동안 온 동네의 전반적인 생태 계를 지역의 공공기관과 협력하고 마을의 전연령세대가 존재하는 현장으로 들어가 교 육, 복지, 문화 생태계를 복원시킨 경우이며, 한남제일교회는 전형적인 도시 중심 환 락가에 위치한 교회로서 교육과 문화 생태계 복원을 위해 서울시의 마을만들기 사업을 적절하게 활용한 경우라고 하겠다.

 1. 생태계 살림과 회복의 교회교육 모델
세 교회의 경우 모두에서 볼 수 있는 교육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 교회는 교회와 마을의 교육생태계를 변혁하는 과정에서 공교육과 연계하는 모습을 띄었다. 물 론 송악교회의 경우 초기에는 농촌지역의 목회와 농촌생태계 복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 교회 모두 지역에 있는 공교육 기관에 들어가거나 공 교육을 수행하는 구청이나 시청의 공무원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학교의 교사와 교 감, 교장을 돕는 단순한 역할에서부터 신뢰를 다지는 것이 특징이다. 송악교회의 이종 명목사는 교회 옆의 송남초등학교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학교에서 생태 교육을 수행할 교사와 버스를 운전할 기사가 동시에 필요한 것을 알아채고 이종명목사 는 그 일을 자원하였다. 학교의 아이들을 데리고 들과 산과 개울을 다니며 아이들에게 풀과 나무와 곤충의 이름을 가르쳐 주고 풀치기와 개울관리하기 등을 알려주며 시골산 길에서 신발을 벗고 걸어다니며 즐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생명존중에 대하여 그리 고 자연돌보기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것이다. 부천새롬교회의 이원돈목사는 부천시 약 대동의 가난하고 혜택받지 못한 동네의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로 자신의 사역을 삼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지역아동센터와 도서실을 운영하며 부천시의 공무원들 과 협력을 도모한 결과 이제는 부천시에서 이원돈목사에게 의뢰하는 사업이 점점 늘어 가고 있다. 그는 마을이 꿈꾸면 교회가 춤을 춘다는 유기적 아이디어를 갖고 마을의 어 린이, 청소년, 장년, 노년들이 꿈을 꾸게 하는 일을 구상한다. 최근에는 장신대 신대 원 재학 중인 이승훈전도사와 함께 약대동 근처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꼽이 식당”(꼽이 라는 말은 꼽살이라는 틈새를 채워주는 행위를 의미한다)을 운영하며 저녁 시간 방황 하며 공부를 도와줄 사람도 없고 저녁 끼니를 해결해 줄 사람도 없는 청소년들의 마음 과 배를 채워주는 사역을 하고 있다. 한남제일교회의 오창우목사도 역시 이 교회에서 30년 이상을 사역해 오고 있는데, 이 교회는 이태원과 한남동의 경계에 있는 교회로서 도시의 엄청난 변화를 몸으로 체험하며 마을 전체를 체험현장과 이야기 창출의 장으로 여기고 사역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는 교회가 서울시 중심에 있다는 의미는 서울을 사역의 장으로 하고 서울시가 지닌 수많은 문화적 자원을 잘 활용하는 것이 사역 성패 를 좌우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로 하여금 ‘꿈꾸는 도시 탐험’이라는 수직적 세대 통합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함으로써, 전세대가 함께 도시 라는 마을 속에서 어떻게 마을을 이해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구상을 하도록 돕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교회가 용산구청에 위치한 것을 십분 활용하여 용산구 청에서 지원하는 마을만들기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용산구 전체를 교회의 사역 마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꿈꾸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사역을 통하여 오래전부터 동네 아이들을 모아 악기를 가르쳐주고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감성적 사역을 실시한 결과 이제는 멋진 동네 오케스트라가 되었다고 한다. 이원돈목사와 이종명목사와 오 창우목사는 교회의 사역범위를 교회 안으로 제한하지 않고 마을 전체를 학교로 사역의 장으로 여기고 마을로 들어가 그곳에서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있다.9)
9)   졸저, “다음세대의 생명을 살리고 번성케 하는 교회교육 모델 탐구,” 『다음세대 신학과 목회』(서울: 장로 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16), 70-78.

2. 생태계 살림과 회복의 주는 하나님, 종은 사람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며 모든 일 가운데 섭리하신다. 그 리고 그 하나님은 교육에서는 하나님의 교육(에듀카치오 데이)을, 선교에서는 하나님 의 선교(미시오 데이)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조로부터 지금까지 지속된 하나 님의 일하심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거니와 사람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을 받아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권리와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다. 이는 피조세계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위임하신 일을 성실 함, 진정성, 지속성, 전문성, 그리고 희생정신으로 투명하게 경영하고 관리해야 하는 엄청난 책임과 의무를 동시에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 교회, 우리 마을이 라는 조화로운 생태계 살림과 회복을 가능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우리 모든 생태세계의 주인이시다. 그리고 인간은 그분의 종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나타나 는 그림과 같이 올바른 교회론을 비롯한 신학적 확신과 이를 삶에서 과감하게 옮겨낼 수 있는 실천정신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 진정한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림 2: 우리 교회, 우리 마을을 살리는 창의적 리더십>10)
10) 졸저, “미래세대를 살리는 프로젝트의 성패는 누구의 손에 달려 있을까?” 『교회성장』 2016년 2월호.


Ⅳ. 결론
우리가 끊임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고 함부로 자연 생태계와 교육 생태계를 망쳐 비인간화되어 마을 생태계를 ‘조화와 상생의 장’으로 만들기보다는 ‘경쟁과 착취의 장’으로 만들어버린다면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 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약속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기도 전에 인 류는 그대로 망해버릴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우리 교회, 우리 마을의 이야기를 만 들어야 한다. 그래서 생태계를 회복하고 다시 살려내어 땅에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 스리라는 하나님의 원(原)명령을 종으로서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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