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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고미애 약사 30주기 추도식, 생전의 동료 · 지인 · 후배들의 애도 속에 줌으로 열려

마을이 꿈을 꾸면..

by 아름다운 마을 2022. 2. 15.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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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고미애 약사 30주기 추도식, 생전의 동료 · 지인 · 후배들의 애도 속에 줌으로 열려

  • 기자명 이종헌(편집위원장) 
  •  입력 2022.02.14 16:44
  •  수정 2022.02.14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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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통해 촛불혁명을 완수하는 것만이 고인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

 

1992년 2월 설 연휴 기간에 지역 주민들의 의약품 접근성 향상을 위해 약국을 열었다가 불법 체류자인 필리핀 노동자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고미애 약사의 30주기 추도식이 지난 13일(일), 생전의 동료 · 지인 · 후배들의 애도 속에 줌으로 개최되었다.

고미애 약사는 1987년 숙명여대 약학대학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의 선두에 섰고, 졸업 후에는 공장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이 많이 거주했던 부천시 약대동에 약국을 열고 약사로, 또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가진 자만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고, 없는 자들은 약 한 번 제대로 못사먹는 벽을 허물 것이다.”

1989년, 당시 공장 밀집 지역 내 노동자 마을이던 부천시 약대동에 ‘아람약국’을 연 고미애 약사는 하루 14시간 약국 일을 하면서도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지역보건분과장, 부천지역민주화운동협의회 상임위원, 주거권실현을 위한 부천시민연합 상담실장, 약대글방 교사, 새롬공부방 자원교사 등 사회 운동에 헌신했다.

부천에서 고미애 약사의 삶은 고작 4년이었지만 그녀는 40㎏의 가냘픈 몸으로 24시간을 쪼개가며 불꽃 같은 삶을 살았고, 약자를 옹호하고 민중을 사랑했던 그녀의 정신은 1993년 고미애 약사상으로, 또 3년 후인 1995년 ‘부천 외국인 노동자의 집’ 설립으로 활짝 꽃을 피웠다. (고미애 약사상은 1993년 제정 이후 자금난으로 중단되었다가 2017년 부활해 지난 1월 19일, 제6회 시상식을 개최했다.)

 

고미애 약사 30주기 추도식 장면

 

한편, 이날 추도식에는 당시 주거권실현을 위한 부천시민연합 의장으로 활동했던 지성수 목사, 약대글방 공부방 선생님이었던 꽃사슴 고미애 선생님을 기억하는 ㈜한결문고 정성회 대표, 선후배 약사 이규화, 원남숙, 임희원, 윤선희, 그리고 1987년, 숙명여대 음악대학 학생회장으로 고인과 함께 6월 항쟁을 함께했던 민중가수 최도은 등이 참여했다.

지성수 목사는 고미애 약사 영결식 때 입었던 두루마기를 입고 나와 좌중을 숙연하게 만들었고, 민중가수 최도은은 평소 고미애 약사가 애창했던 노래 ‘너를 부르마’를 불러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더했다.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여

시궁창에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새삼스레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부르마

자유여

민주여

내 생명이여

자유여

민주여

내 사랑이여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부르마

 

-민중가요 ‘너를 부르마’ 가사 전문

 

故 고미애 약사

 

아랫글은 지난 2017년 발간된 『부천약사회 50년사』 중에서 발췌한 고미애 약사 평전이다.

 

부천시약사회 50년사 인물 열전 '고미애 약사'

 

 고미애 약사

| 도시빈민과 영세민 속에서 불꽃처럼 살다 |

 

짧지만 굵게 서민들이 살아 숨 쉬는 바로 그곳에서, 참 약손이 되고자 열정을 뿜고 살았던 고미애 약사의 뜻을 존중하는 상이 부활하기를 희망한다. 그래, 지역 사회에 건강한 생활인으로서 약사로서 정체성을 고민하는 일꾼이 있다면, 그분들에게서 좋은 기운이 솟구치고 있다면, 함께 격려하고 박수치자. 어떤 식으로든지.”

2016년 봄에 원남숙 약사(소사구 지매약국)가 친구 고미애 약사를 추모하며 쓴 글이다. 원 약사에 따르면, 부천의 시민사회단체에서 잔뼈 굵은 어른들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는 몰라도 지역에서 참으로 성실하고 진솔했던 약사 일꾼 고미애는 잘 안다고 한다.

고미애 약사는 1988년 숙명여대 약대를 졸업했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에 가입하여 부천 지역 보건분과장으로 있으면서 올바른 의료 전달 체계의 수립과 국민건강권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부천지역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과 주거권 실현을 위한 부천시민연합 상담실장 등을 역임하며 민주화 운동에도 기여했다. 또 새롬공부방 자원 교사로도 활동하며 불우 청소년의 학습 진작과 정서 함양을 위해 노력했다. 몇 장의 글로 그녀의 삶을 회고할 수는 없겠지만, 함께 추억하고 공감하는 계기로 만들어보자.

 

부천 지역 공영 약국에 있어 선구적 역할을 했다

 

1991 5 약사공론에는 부천 지역 공영 약국에 대한 기사가 크게 실렸고, 환하게 웃는 고미애 약사의 사진이 실렸다. 고 약사는 인터뷰에서 미래의 의료 체계가 약국도 보건 교육의 장으로서 기능의 활성화를 요구한다고 볼 때 약사 혼자보다는 복수 약사를 이뤄 업무를 분담 처리하는 것이 전문 직능을 발휘하기에 용이할 거예요. 공영 약국은 1약국 2인 약사 제도를 자연스럽게 이룩하여 주민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공동 출자, 업무 분담으로 경영의 효율성을 추구하지요라고 밝혔다. 고 약사는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동료이자 친구인 허영숙 약사와 함께 1989년부터 부천에서 아람약국이란 공영 약국을 개국하여 1약국 2인 약사 체제로 운영했다.

고 약사는 전남의 농민 약국처럼 지역 사회 운동과 연계된 지역 약국을 추구했으며, 공영 약국의 장점을 살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사회봉사 활동과 도시빈민 운동에도 앞장섰다.

주민들은 의료 상담뿐 아니라 부부 관계나 자녀 교육, 행정적인 문제까지 모두 아람약국으로 싸들고 달려왔다. 고 약사는 아이들이 수시로 찾아와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틈틈이 놀아주기까지 했다. 이런 자세는 새롬공부방의 열정적인 자원 교사 역할을 하는 데 바탕이 되기도 했다.

한번은 약국에 아이가 와서 아무 두통약이나 달라고 하자 고 약사는 그 아이를 돌려보내며 어른에게 가서 전화를 하라고 시켜 수입이 우선이 아니라 보건이 먼저임을 몸소 보여준 적도 있다. 또한 주위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 상담에 특히 신경을 쓰며 잘못된 건강관을 교정해주기도 했다.

 

 

부천 야학의 중추인 새롬공부방의 열정적인 자원 교사였다

 

1986년 새롬교회는 부천시 약대동에서 어린이집을 시작했고 1990년에는 지역 최초로 새롬공부방을 운영했다. 당시 약대동은 부천에서 가장 열악한 주거 지역으로 영세 공장이 많은 곳이었다. 빈곤, 결손, 저소득 맞벌이 가정 아동과 불우 청소년이 방과 후 길거리에 방치되는 상황에서 이들을 보호하고 돌보며 함께 공부하기 위해 새롬공부방을 시작한 것이다. 매주 금요일 고 약사는 약국을 마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천 야학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새롬공부방에 가서 공단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자원 교사로 열정적으로 일했다.

 

부천 지역 사회 활동과 민주화 운동의 꽃이요 보배였다

 

윤선희 부천시약사회 부회장(소사구 부부약국) 1992년 설 연휴 당시 숙명여대 총학생회 대표로 고미애 약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때 장례식장에 가서 잠시 앉아 물을 마시는데 옆 테이블에서 이런 말씀들을 하셨어요. ‘하루 14시간씩 약국에 근무하던 바쁜 몸으로 사회 활동을 몇 개나 한 거야. 다들 고미애가 우리 단체 활동가라며 찾아오는데 서로 깜짝 놀랐다고 말이죠.”

고 약사는 부천시민연합의 전신이었던 부천지역민주운동협의회 상임위원과 주거권 실현을 위한 부천시민연합 상담실장으로 헌신했으며, 도시빈민과 공단 노동자를 위한 건강 상담과 의료 활동은 물론이고, 오쇠동 영세민들의 임시 이주 단지 마련 등의 도시빈민 운동, 탁아소 후원 등의 활동에도 빠지지 않았다.

당시 함께 활동했다가 지금은 호주에 있는 지성수 목사는 2015 12월 고 약사에 대한 글을 딴지일보에 기고하기도 했다. 지 목사는 고 약사는 내가 책임을 진 부천주거연합의 회계와 서기를 함께 맡은 살림꾼이었다.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한 번도 어려운 생활을 해보지 않았던 미애는 나를 도와 수도 없이 철거민들의 텐트를 찾았다. 미애는 한창 멋을 부릴 나이에 늘 유행과 상관없는 옷을 입고 다니면서 그 작은 몸에서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항상 빈틈없이 정확하게 자기가 맡은 일을 해냈다. 나에게 그녀는 성깔 있는 성녀였다라고 했다.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의 씨앗이 되었다

 

고 약사는 지역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3D 업종에 물밀듯이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고 약사가 개국한 곳은 도시빈민, 공단 노동자는 물론 탄압받던 외국인 노동자가 많았던 부천시 약대동이었다. 1990년대 초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병원은 먼 이야기였고, 그나마 영어를 할 수 있는 약국에 들러 약사에게 얻는 정보나 건강 상담은 그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 노동자들과 더불어 외국인 노동자들의 애환을 보듬어 안고자 일부러 들어간 지역에서 필리핀 불법 체류 노동자에게 죽임을 당한 그녀의 사연은 참으로 안타깝다.

당시 고 약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서영석 약사(경기도의회의원) 고미애 약사는 지역에서 외국인노동자는 물론 시민들에게 좀 더 다가서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한 사회운동가였다. 그녀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 놀라움과 분노, 아쉬움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그녀의 생전 발자취대로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외국인 노동자와 불법 체류자에게 인도적 지원을 해서 고 약사의 죽음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운동과 움직임이 약사들 사이에서 활발했다고 회상했다. 이와 같이 그의 주변 동료와 선후배는 분노에 머물지 않고 인도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외국인 노동자와 불법 체류자에게 의료 지원과 혜택을 주는 지역 사회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고 약사의 장례식장을 지켰던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 손인환 센터장(한의사) 고 약사의 죽음을 계기로 1995년 부천 지역 시민사회단체,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이사회를 조직해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을 열었고, 1999년 무료 진료소를 개소했다고 회고했다. 고 약사가 씨앗을 심은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은 이제 커다란 나무가 되었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정기 진료 투약 활동도 매우 활발하다. 부천시약사회 여약사위원회에서는 위원회의 고유 사업으로 이를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고미애 약사상을 부활시키자

 

1993 2 한겨레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부천분회(분회장 직무대행 최문숙, 연지약국)와 부천민주운동협의회(공동대표 김명원 부천노동법률상담소장)가 모임을 갖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오다 안타깝게 숨진  고미애 약사의 뜻을 지역 사업으로 정착시키고 지역 사회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추모 사업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 이에 따라 지역 주민들과 함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 지역 주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 증진하고 환경보건 부문에 애정을 갖고 실천해온 사람, 소외받는 곳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며 사랑을 실천해온 사람을 매년 선정해 시상하기로 했다.”

이 상의 첫 수상자는 주거권 실현을 위한 부천연합이었으며, 고인이 봉사하던 약대동 지역의 약대 신나는 가족도서관이 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한동안 고미애 약사상이 운영되며 그 따뜻한 마음이 이어졌으나 재정상의 이유로 안타깝게도 중단되었다. 윤선희 부회장은 2016 약사공론과의 인터뷰에서 약사회가 나서 고미애 약사상을 이어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보여주기가 아닌 진정한 봉사를 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고 약사의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약사회가 부활시켜야 한다고 촉구했고, 이런 마음과 뜻은 점차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부천시흥지회 임희원(단골약국) 회장과 회원들(구생약국 서영석, 메디팜백송약국 백용욱, 지매약국 원남숙, &김약국 김은미, 나래약국 이규화, 성주약국 유용훈, 부부약국 윤선희, 시흥연합약국 임대완) 2017년부터 고미애 약사상을 부활시켜 고 약사의 뜻을 잘 기릴 수 있는 시민사회단체들에게 수여할 예정이다.

1992 2월 고 약사는 고인이 되었다. 함께 활동했던 지성수 목사는 내가 일생 동안 치른 장례식 중 가장 비통한 장례식이라고 회상하며 애절한 추모문을 남겼다.

 

나는 설날의 추위 속에서 부천 성가병원 영안실 마당에 낮게 울려 퍼졌던, 내 생애 가장 감동적인 그 노래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눈물이 어린다.

내 형제 / 그리운 내 얼굴 / 그 아픈 추억도 / , 짧았던 내 젊음도 /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부천의 공단 지역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40킬로그램 가냘픈 몸매의 고미애라는 처녀가 있었다. 미애는 약국을 운영하면서 한 달에 20만 원만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는 모두 빈민과 노동자를 위해서 썼다.”

 

우리는 아마도 그녀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보여주기가 아닌 참된 봉사를 하며 도시빈민과 영세민 속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고미애 약사를 언제까지나 잊지 못할 것이다.

*위 글은 2017년 작성된 것이므로 개인 프로필이 현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종헌(편집위원장) h2on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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