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언어로 말하라!“ (사도행전 4; 5-22)
우리는 지난주 5,18일 광주 민중항쟁 31주년을 기념하였습니다,
오늘 성령이라는 주제를 이해하는데 이 광주 민중항쟁의 경험을 나누는것이 중요하기에 그 31년전 광주의 이야기로부터 오늘 말씀을 시작 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성서의 제자들이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을 경험하지전의 그들의 언어는 어떠하였을까요!
그들이 성령의 경험하기 이전의 성령시대 이전의 언어를 성서는 바벨탑의 언어라고 하는데 이 바벨탑 시대의 언어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성령을 경험하기 이전의 바벨탑 시대의 세상의 언어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이전의 삶의 특징은 침묵입니다, 침묵의 문화입니다,
제국과 식민지의 백성을 특징은 침묵입니다,
바로 31년전 광주를 경험하기 이전 우리 한국사회 즉 일제 식민지 시대와 독재시대의 언어를 한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하면 두려움과 공포의 침묵의 언어라고 합니다이 두려움과 공포의 침묵의 언어 바벨탑 문화의 핵심은 혼란입니다.
이시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또한 그것을 마치 자기 생각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침묵의 바벨론 문화란 말이 없은 침묵 문화 뿐아니라
비판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못한 문화를 의미합니다
우선 말이 없음을 의미하지만 궁국적으로 새롭고 창조적인것에 침묵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낡은 침묵의 어두운 문화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낡음과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말이 없을 뿐아니라
새롭고 창조적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새롬고 창조적인것에 오히려 박해하고 방해하는 역할을 합니다,
말을 한다고 다 말이아니라 지난 식민지와 독재 시대의 말이란 아직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최근 5,18에 어떤 당의 자문위원이란 분이 트위터에 어느 여배우의 발언에 대해 입을 다쳐라는 말과 함께 쌍욕을 하였고 어느 반공단체에서는 광주사태까지 아직도 폭도와 빨갱이의 소행이라고 하는 정말로 반역사적인 발언들이 다시 고개를 드는 실정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상은 많은 부분은 이 바벨의 문화와 침묵의 문화가 중심에 서있습니다, 특히 바벨탑의 언어는 오늘 본문 18절 말씀처럼 도무지 에수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치도 말라합니다,, 새로운 시도 새로운 말 새로운 실험을 두려워하고 자꾸 막으려고 하고 가장 심각한것은 침묵문화는 새롭고 창조적인것을 죽입니다,
이 침묵의 기간 우리의 언어습관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할말을 하지 못하고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제대로 말을 할줄 모르면
말은 그때부터 꼬이고 뒤틀리고 혼란스러워 지면서
이상한 언어 습관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왜 언어가 타락하고 뒤틀리고 혼란스러워 질까
우리가 작년에 함께 공부한 구역성서의 신명기서에 보면 이스라엘이
식민지의식에 쩔어 있을때 광야에서 그들이 어떠한 말을 하였는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명기; 4-12절 가운데 그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라는 말씀을 다섯번이나 주제를 반복하여 나오는데
이들이 이스라엘이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을때 그들의 언어의 주 습관은 불평과 원망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이 원망과 불평의 식민지 근성을 고치는데 광야에서 무려 40여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운명이 1. 불신하는 부정의 소리 2. 불평하는 소리 3. 불만하는 소리의 3불과 원망과 불평의 이 바벨론시절의 언어 습관이 고쳐지지 않는한 우리의 운명이 결코 새로워지지 않을 정도로 치명적 언어 습관인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습관이 바 성령을 경험하기전의 바벨탑시절의 언어 습관이고
이 바벨탑언의 특징은 바로 혼란과 타락의
치명적인 언어습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에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입을 열어 말하지 시작하자 관원들이 보인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사람으르 고치지 말라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창조성이 새롬움이 자신의 기득권을 흔들까바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교우 여러분 그러면 일제 식민지 시대와 독재시대의 바벨탑의 시절을 거친 우리들이 언제부터 우리가 제대로된 말을 시작하였습니까?
우리는 바로 31년전 광주 민중항쟁을 거치고 민주화를 거친 지난 20년 처음으로 입이 열려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이후 시대 성령이 오시면 우리 삶에 새로운 불길과 바람이입니다,
가장 먼져 시작되는 것은 입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의 말문을 열게 합니다,
성령의 언어를 가진 사람은 그공동체 가정 회사에 꼭 필요한 말인 부활의 말을 하기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공동체와 가정과 직장이 활력을 갔기 시작합니다,
최근 사람들이 다시 새롭게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김여진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일천 구백 팔십년, 오월 십팔일 그날로 부터,
단 한 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당신은 학살자입니다. 전두환씨.
(오늘 한겨례 신문에 보니 우리 교회 이성재 교우의 트위터 글이 실렸습니다)
학살자를 학살자라고 말하지 못하는 현실! 학살자는 어감에 문제를 삼는 허위의식! 진실이 살기에는 천박한 교양사회다! 비인간적 교양이라니!
(이성재 교우)
학살 1 오월 어느 날이었다. 8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 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당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이후 성령을 받으려면 성령의 언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세가지가 필요한데 가장 먼져 교양 신앙인으로 태어 나야 합니다,
교양시민과 신앙인의 첫 번째 특징은 제대로된 말하기를 하는 사람들의 층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진극인 유럽의 사회통합을 이끈 주체인 '교양시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교양시민이란 일종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과 같아서 이 교양시민이 튼튼해야 시민윤리와 공공질서 그리고 배려·헌신·신뢰·준법정신이 높다는 것입니다. 교양시민이란 공동체에 대한 배려와 사회윤리가 몸에 밴 중산층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교양시민이 두터운워야 시민정신과 역사적 책임감이 강하여 민주주의와 시장원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과 쟁점을 해결하고 사회통합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양시민과 교양 신앙인들이 튼튼해야 국가와 교회가 튼튼해 지는데 이러한 교양시민과 교양신앙인의 가장 큰 특징은 이들은 적어도 더티 플레이는 하지 않듯이 우리의 신앙과 언어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언어와 신앙습관이란 무엇인가?
구약의 낡은 시대의 종교는 희생제 중심의 종교입니다,
예배가 동물의 희생제물과 희생피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성령의 시대 교회는
낡은 구약 시대와 같은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습니다,
희생제란 무엇입니까? 예배와 종교가 다른 동물을 희생제물로 삼아 자신의 죄를 씻는 수준의 예배 행위를 의미 합니다,
이러한 희생제 시절의 종교인과 신앙인의 언어 습관은 바로 저 사람때문이에요 하는 남을 끌고 들어가거나 남의 탓을 하는 남의 희생을 요구하는 언어습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마지막으로 이러한 희생제물을 드리고
다시는 동물의 희생 제물로 드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러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걸고 넘어지고 불평 불만 원망하는
희생제 시절의 언어를 자제하고 다스리고 감정을 넘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언어 분석 해석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햐 한다, 이러한 훈련이 된 사람이 바로 교양신앙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가장 먼져 언어 생활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두 번째로 훈련되어야할 성령의 언어훈련은 우리의 삶과 신앙의 언어에 운동력과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브리서 4;12절에 보면 말씀은 운동력과 분별력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러한 성령의 언어는 이처럼 분별력과 운동력을 가져야 합니다,
날이선 검보다 예리하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수 있을만큼의 분별력과 운동력을 가지고 모든 정보를 분류 재 통합할수 있어야 하는데 기도에 이러한 능력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성령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마치 해빛을 모으면 에너지가 생기고 종이를 태우듯이 성령의 언어는 우리의 언어에 집중력이 생기고 우리의 언어가 성령의 뜨거움과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1. 예수의 이름이외에 다른 구원의 이름을 주지 앟았다는 말씀이 바로 그말씀이고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을수 없다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이 두 말씀은 바로 우리의 신앙 언어를 동력화 역동화 하고 집중화하여 뜨거움과 바랍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5월 16일날 제 페이스북에 부천의 작은 영화운동을 하시는 안정숙 선생님이 이런글을 올렸습니다,
5월을 위해 이렇게 열정과 바람을 가지고 열심히 움직이시는 분이 있어 지금 3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열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감사의 마음으로 제가 이러한 덧글을 올려드렸습니다,
이렇게 서로 소통하여 결국 5월24일 꿈터 어르신 7명이 교회차를 타고 간다고 합니다, 교우여러분도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성령 강림의 계절 5,18 31주년을 지내며 우리는 부활이전의 성령강림이전의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전하지도 말라는 낡은 침묵과 불평과 불만의 바벨탑의 시대를 벗어나
이제는 부활과 희망을 성령으로 말하는 뜨거움과 열정의 새로운 성령의 언어의 바람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놀라운부활의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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