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 시대 교회를 말한다 생명평화마당,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청어람아카데미는 지난 4월 11일에 청어람 아카데미에 모여 ‘탈성장주의 시대, 교회를 말하다’를 주제로 공동심포지엄을 개최하여 탈 성장주의 시대, 작은 교회의 대안을 모색 하였다. |  | | 4명의 발제자 좌로 부터 김영철 목사 김진호 목사 정재영 교수 이원돈 목사 |
1. 오늘 우리의 주제는 탈 성장주의 시대의 교회의 미래이다. 이원돈 목사 (부천 새롬 교회) 오늘 우리가 교회와 사회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려 볼때 더 이상은 고정된 고체의 근대적 시각으로 파악도 불가능하고 미래도 예측할수 없는 그야말로 유동적 역동적 복잡계의 현상일 것이다. 이는 오늘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분리되어 독립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현상들의 연결망(network)으로 연결되어 생태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상호의존 상호 침투 상호 관계망의 현상으로 보고 새롭게 현실을 진단 파악 그리고 참여하는 방법으로 최근에 생태계라는 말이 부각되어 사회와 기업을 진단하고 대안을 세우는데 부각되기 시작하였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로 상호의존적 생태적 연결망으만 제대로 파악 참여할수 있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 모던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장 당황하며 새로운 생태계에 적응력이 약한 집단이 바로 가장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 되었던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한 한국 교회임이 부각 되면서 오늘 이 탈근대 탈 성장시대의 사회적 문제 집단으로까지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 이후 탈근대 포스트 모던 사회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바로 생각하는 이성이 실종이 되고 거대담론과 역사 발전과 진보에 대한 확신 종말된 사회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무한경쟁 승자 독식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여기에 겹치면 우리는 진짜로 불안 증폭의 피곤 사회속에서 살게되는것 이다. 이러한 포스트 모던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현대인들은 개인을 넘어서 사회와 역사와 진리를 결코 생각하거나 이해하거나 고백하는것이 쉽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고 오직 감정적인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삶의 스타일을 강요 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늘 교회에게 가장 문제화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종교의 사사화(私事化, privatisation) 현상으로 교회 마져도 더 이상 공공의 영역에서 공적 미션을 수행하는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적 집단의 사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집단이 되어가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포스트 모던 탈 근대 사회가 다 부정적인 기운만이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는 근대 산업 사회가 1;99의 사회를 만들어 놓고는 스스로 붕괴되어 가며 서서히 탈근대 사회가 동터 옴을 보아야 한다, 특별히 이러한 근대 산업화 시대의 ①. 생산양식은 탈 산업 근대 사회에는 대량 생산 소비 폐기에서 다품종 소생산으로 바뀌고 ②. 라이프 스타일은 소유 독점 고립 2.0 참여 개방 연대 3.0 생태 생명망 사회로 바뀌며 ③. 성공한 인간의 유형도 점점 무한경쟁 승자 독식 스펙(불안증폭 피곤 사회)에서 우정 환대 협동(마을만들기 사회적기업 협동조합)으로 바뀌어 가며, ④ 권력은 분산되고 서로 협동하는 사회가 뜨고 있는 것 이다, 2. 탈성장주의 시대 김진호 목사 _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한국교회도, 1990년대를 기점으로 저성장 시대에 돌입했고, 1995년 이후에는 마이너스 성장에 직면하게 됐다. 과거 대성장 시대, 사회와 교회 간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호 연동성이 높던 시대에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청년계층에서는 선호도가 높은 종교로 개신교가 꼽혔었다. 그때에도 개신교는 일방주의와 배타주의적 성향이 강한 ‘무례한 종교’였지만, 그것에 대한 사회적 저항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대성장 시대 개신교의 성장주의 담론이 이농자 등 사회 주변계층을 대대적으로 포용하였고 능동적인 사회적 생산자층으로 재무장화함으로써 사회의 긍정적 시선이 많았었다. 한데 민주화 이후 사회는 권위주의의 청산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부상했지만, 교회는 여전히 권위주의가 흔들리지 않는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심한 종미(從美)적 태도, 특히 미국이 이라크, 아프간 등에서 일으킨 전쟁까지도 지지하는 친미 호전적 태도는 개신교가 미국 패권주의의 앞잡이라는 인상을 뚜렷하게 새겨놓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대중문화에 대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로 인해 교회는 문화적으로 지체된 낡은 공간으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사회의 공공성 확대를 위해 기여할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 즉 교회와 사회 간의 연동성의 와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에 처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과거 대성장 시대에 조율된 신학교육체계와 교회운영체계는 거의 개혁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산 성장주의 신기법들이 신학교와 교회를 휘젓고 있다. 신학교는 변화된 사회와 사람들을 묻는 학제적 기획이 전무한 가운데 신학생 양성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교단본부는 교회의 사회지리학적 변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목회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대형교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성장의 기획들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즉 성장주의적 제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성장은 멈추거나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심포지엄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오늘 우리의 변화된 사회를 읽으면서 교회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 이를 통해 기독교 대중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 이 심포지엄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개신교 내부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은 저서들의 출간이 계속되었다. 우리는 그중 지난 2012년에 출간된 몇몇 주목할 만한 저작들의 문제의식을 화두삼아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이 저작들은, 그리고 그밖의 많은 저작들은 공히 한국교회의 위기를 성장지상주의, 그리고 이와 연결된 문화적, 성적, 계급적, 종교적 배타주의와 권위주의 등으로 보고 있다. 이 심포지엄은 성장지상주의를 초점으로 삼고 이 모든 문제적 요소들을 아우르는 비판적 관점을 공유한다. 하여 우리는 이 심포지엄의 화두를 ‘탈성장주의’로 삼았다. 우리가 말하는 탈성장주의는 두 가지 층위를 모두 포함하는 용어다. 첫째는 외적(사회적) 변화의 층위이고, 둘째는 내적 요청의 층위다. 전자에는 성장지상주의의 청산을 도모하는 탈성장주의 기획은 교회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시대의 요청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후자는 한국교회의 성장지상주의가 너무 지나친 탓에 어떠한 대안적 기획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형교회 중심적인 내적 제도의 청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데 탈성장주의적 신학과 신앙의 기조는 무엇인가? 성장지상주의는 교회의 팽창을 핵심으로 하는 신학적 신앙적 기획이다. 한데 팽창은 언제나 양적 비교를 통해 가치가 평가된다. 하여 더 큰 성장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많은 사회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은 대형교회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대형교회가 교회들 사이에서 성공한 교회라는 의미에 한정될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2천 명 이상의 성인이 최소한 한 주에 한번 이상을 모이는 사회적 결속체다. 그만한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갖춘 결속체를 시민사회 속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교회는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히 높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는 시민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적 결속체에 속한다. 그것은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대형교회는 강력한 사회적 권력집단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여 대형교회의 성공주의는 신앙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세속적인 성공주의적 함의를 포함한다. 이렇게 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주의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결합될 때 그 성장지상주의는 주변으로부터 종종 폭력적인 팽창주의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더욱이 대형교회가 계층적 성향을 가질 때 그 성장지상주의적 신앙행위는 계급적 배타주의를 공격적으로 표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오늘 한국의 교회는 이런 점을 점점 더 노골화하고 있다고 시민사회로부터 읽혀지고 있다. 하여 사람들은 오늘의 성공지상주의적 교회를 공공성을 훼손하는 사회적 결속체라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성공지상주의를 청산한다는 것, 탈성장주의적 신학과 신앙을 추구한다는 것은 교회가 사회적 공공성에 더 많은 기여를 하도록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을 뜻한다.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서는 말했다. 요컨대 신앙은 (교회의 팽창이 아닌) 이웃의 공공성을 확대하려는 실천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탈성장주의적 신학과 신학이 추구하는 이웃의 공공성 확대 실천이란 무엇일까? 3. 그런데 이러한 ‘성장주의’는 어떻게 ‘교회론’이 되었나? 양희송 대표 [청어람아카데미 대표] 자주 경험하는 것이지만, 한국 개신교에는 ‘성장주의’외에는 교회론이 없다. 큰 교회는 성공한 교회이고,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나쁜 교회이다. 우리는 교회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다른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성장으로 귀결되는 모든 것은 정당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고, 성장을 일으키지 못하는 어떤 것도 무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한국 교회에는 ‘공룡이 되어서 생긴 문제’와 ‘공룡이 되지 못해 생긴 문제’만 있는 셈이다. 교회 안에는 ‘성장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교회의 크기는 마구 증가할 수는 없다. 성장을 가능케하는 두가지 축이 있는데, 첫째는 ‘무대(stage)’이다. 설교 혹은 무대 위의 스펙터클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향력의 크기만큼 교회는 커질 수 있다. 둘째는 ‘조직(structure)’이다. 목회자나 성도들이 조직화 되는 수준까지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두 가지 요소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어느 수준에서 동적 평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두 요소 위에 어떤 내용이 실려서 전달되느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가 교회론을 말할 때에는 ‘양적(quantitative) 평가’와 ‘질적(qualitative) 평가’를 뒤섞거나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면, 조직이 커지면서 사람들 간의 교류와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이때 사람들은 질적 차원의 체감적 만족이 낮아지는 것을 경험하지만, 그 문제는 엄밀히 말하면 양적 측면을 개선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 내용이 신학적으로 부실하거나, 목회자가 신앙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질적인 측면에서 다룰 문제이다. 이 둘을 혼동하거나 뒤섞는 범주 오류는 교회의 존재가치를 영구적으로 손상시키고, 문제의 원인을 오도하게 한다. 나는 이런 측면에서 ‘셀교회 운동’이나 ‘가정교회 운동’에 대해 약간은 유보적 입장을 갖고 있고, 여러 종류의 ‘작은교회 운동’ 역시 좀 유보적으로 보게 된다. 교회의 형식적 측면의 변화가 분명히 내부 구성원의 상호작용 방식을 변화시키고, 이전의 구조에서 간과되었던 측면을 신선하게 환기시키는 지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교회가 지향할 ‘가치의 재구성’이란 측면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사실상 큰 덩어리를 잘게 쪼개어 관리(divide & rule)함으로써 통제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조직관리의 도구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은 내건 구호와 방향성에 현저히 미치지 못하는 매우 실망스런 적용이 될 것이다. 지난 30년간 ‘제자훈련’이란 개념을 목회에 도입하여 크게 주목 받았던 ‘사랑의교회’가 현재 비판받는 자리에 선 이유도 그 근저에는 성도 개인의 신앙적 성숙을 위해 규모의 성장이 조절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4) 4 ‘탈성장 시대’를 위한 ‘탈-성장주의 교회론’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의 교회론이 좀더 급진적으로 나아가서 존 밀턴이 말했던 ‘개인으로서의 교회(church as individual)’에 이르는 충분히 개인주의적인 수준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론의 모색은 결국 개개인을 충분한 신앙적 주체로 세워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지, 섣부른 집단주의로 가서는 안 된다. 이런 진단은 우리를 ‘프로테스탄트적 교회론’의 재정립으로 이끈다. 내게 ‘탈성장(주의) 시대’를 위한 ‘탈-성장주의 교회론’의 요청이란, ‘성장’이란 미명 아래 개인을 집단의 하부단위로 종속시키고 성직자들을 위계의 상층부로 올려놓았던 봉건적 중세교회로부터 개혁을 시도한 종교개혁자들의 문제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5) 대표적인 종교개혁의 슬로건 중 하나였던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는 그 믿음의 주체로 ‘생각하는 개인(a thinking individual)’이란 근대적 상상을 전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누구에게나 자신을 둘러싼 집단과 신앙고백적으로 불화할 수 있는 독자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근대적 ‘양심의 자유’로 직결되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와 떨어질 수 없고, 이는 ‘사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를 필연적으로 유발하게 된다.6) 적어도 개신교인, 혹은 개신교회라고 자처하면서 이 흐름을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은 자해행위이다. 이 흐름이 던지는 문제의식이 버거워서 고군분투할 수는 있지만, 방향성 자체를 포기하고 오래된 집단주의와 위계질서로 복귀하는 것이 어떻게 개신교적으로 정당화가 될 수 있겠는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을 이렇게 ‘개인’의 중요성을 중심에 놓고 구성하게 된다면,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런 개인들을 ‘공동체’로 참여하게 하는 양식 속에서 교회의 예배, 직제, 선교 등을 재배치하게 된다. 중세교회가 ‘교황/사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ubi Papa, ibi ecclesia)’는 원리를 따른다면, 개신교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among you) 있느니라’(눅 17:21)는 말씀을 상기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교회의 민주적 운영과 참여가 중요한 까닭은 교회가 사제계급을 통한 위계를 따라 진리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각 개인이 교회로 함께 서는 장’이 교회로 인식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배우고, 서로 세워나가는 것이 마땅하며, 권위와 자원의 배분이 기울거나 일방적이 되지 않도록 유의하는 정신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정치학에서 ‘견제와 균형’이라 일컫는데, 이런 근대정치의 원칙이 종교개혁의 교회론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은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5. 탈성장시대 가나안 성도를 통해 본 한국 교회 정재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종교사회학) 최근 한국 교회가 신뢰를 상실하여 전도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현실에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가나안 성도’라는 말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만 현재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찾아 다녔듯이 ‘새로운’ 교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인 것과 같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 또는 의도적으로 ‘기성’ 교회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현재 이러한 가나안 성도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올해 초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조사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 조사” 결과를 보면 개신교인이면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율이 10.5% 안팎을 차지하였고, 한 달에 1번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람이 3.8%인 것을 감안하면 대략 1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가나안 성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가 보다 다양하게 분화하고 다원화되는 경향으로 이러한 가나안 성도는 점차 증가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종교와 관련하여 중심 주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서구에서는 이미 ‘소속되지 않은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이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이것은 세속화의 한 측면으로서 제도화된 종교 형태를 벗어나 자신들의 신앙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신앙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나안 성도들을 통해서 파악되는 종교적 특성은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는 자기식의 신앙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종교사회학자인 로버트 우스노우(Robert Wuthnow)는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를 D.I.Y. 종교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대인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종교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취사선택을 하여 자기자신의 종교를 만든다는 것이다. 가나안 성도들에게서도 이러한 경향이 포착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기독교에 대한 관념이 기존 권위와 충돌할 때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권위에 복종하기보다는 자기자신의 기독교를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보다 교회에 대한 충성도가 덜하고 교회를 쉽게 옮기는 경향이 있어, 기성 교회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교회를 옮기거나 아니면 아예 자신들에게 맞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되기도 한다. 6. 복지동맹과 ‘작은교회’적 신앙의 공공성 김진호 목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1990년대, 특히 1997년 이후 우리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중산층의 몰락과 사회적 양극화를 포함하는 사회적 격차성의 심화에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며, 세계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내포한 구조화된 위기 양상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OECD에 속한 다른 국가들보다 좀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고, 그것을 억제하기보다 심화하는 국가 차원의 행동이 두드러졌다. 여전히 국가는 수출주도형 성장지상주의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가 차원의 행동이란 성장지상주의를 위해 수출 주도형 사회경제 시스템에 몰두하는 것, 그러한 정책과 조치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대기업에게 절대 유리한 사회체제가 점점 더 심화되었음을 뜻한다. 전 세계적인 구조화된 위기와 그것을 더욱 심화시켜온 국가, 이것은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거대한 사회적 반작용을 낳았고, 그것이 최근 복지담론의 고조로 드러났다. 시민사회는 복지체제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고, 각 정치세력들은 앞 다투어 복지의제를 내세우면서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복지는 오늘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공공성의 의제가 된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작은교회’를 주목한다. 앞에서 명명한 ‘짝퉁 대형교회’는 대형교회적 가치에 신앙적 영성이 회수된 중소형 교회로 보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작은교회’는 대형교회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이념형으로서의 소형교회를 가리킨다. 달리 이야기하면 그것은 성공지상주의적 프로그램을 청산하려는 소형교회라고 할 수 있다. ‘작은교회’는 규모가 작고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가질 수 없는 요소를 가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작은교회’는 더 소통적이며 덜 배타적이다. ‘작은교회’는 자기 소유의 공간을 가질 수 없기에 목사의 공간과 평신도의 공간의 이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전형적인 교회 공간을 실현시킬 수 없다. 하여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강화하는 데 불리하다. 또한 소형이기에 대면성(faciblity)이 높으므로 목사는 신자에게 타자적인 카리스마적 존재로 부각되기에 불리하다. 이는 반대로 목사와 평신도는 소통적이며 친화적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즉 ‘작은교회’는 내적으로 더 소통적이며 덜 배타적일 가능성에 열려 있다. 또한 ‘작은교회’는 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므로, 이웃과의 연대에 더 절실하다. 게다가 교회의 헌금 규모가 작기 때문에 수익성이 있는 다른 활동을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는데, 많은 ‘작은교회’들은 국가 복지의 민간위탁기관이 되거나 사회적 기업, 기타 사회복지 활동을 하곤 한다. 그러면 교회당은 신앙의 장소일 뿐 아니라 지역적 공공성을 실행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즉 교회당은 이웃에 개방된 장소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교인들로 하여금 이웃에 대해 개방된 신앙을 갖도록 이끈다. 하여 ‘작은교회’는 외적으로 더 소통적이며 덜 배타적일 가능성에 열려 있다. 이렇게 소통적이며 개방적인 종교성을 형성하는 데 친화적인 ‘작은교회’는 사회복지와 관련해서 대형교회나 ‘짝퉁 대형교회’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면 ‘작은교회’와 그 신자들은 복지 공론장의 일원이 되기에 훨씬 유리하며 미시적이든 거시적이든 의제연합으로서의 복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기에 더 유리하다. 실제로 수많은 ‘작은교회’들은 종교기관인 동시에 공적부조나 사회복지서비스를 위한 국가복지의 민간위탁기관이거나 혹은 민간 사회사업기관을 겸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한국사회에서 교회만큼 사회복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종교나 사회단체는 없을 것이다. 특히 ‘작은교회’는 성장주의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신 더 적극적으로 이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 앞서 말했듯이, ‘작은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덜 배타적이고 더 소통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복지기관일 뿐 아니라, 복지제도를 더 확대하기 위한 사회적 동맹의 일원으로서 더 안성맞춤이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작은교회’는 재정의 어려움과 기관 운영의 낙후성 때문에 금전으로 인한 교인간 혹은 이웃간 분쟁에 시달릴 가능성이 더 높다. 또한 ‘작은교회’들이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신학적 담론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장지상주의적 신학이 아닌) 사회적 공공성을 위한 신학적 재무장을 결여하고 있다. 즉 활동은 과잉인데 의식은 결핍인 양상이 ‘작은교회’의 공공신학적 현실이다. 게다가 교단들은 제도적으로 대형교회 중심적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교단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작은교회’의 목회자들과 일부 교인들의 주체화되는 더욱 방해를 받게 된다.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교단들을 가로지르는 ‘작은교회간 연합’이 요청된다. 이때 권위주의적 모델을 지향하는 ‘조합’ 형식의 조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학적, 신앙적으로 작은교회적 공공신학의 형성을 위한 활동이 요청된다. 이것은 신학연구자, 목회자들, 교인들이 함께 하는 다각도의 소통공간을 필요로 한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작은교회’는 오늘 우리사회의 공공성에 기여하는 개신교적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개신교 신앙의 위기에 대한 탈성장주의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