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연동교회 대학부 시절, 새롬교회 서울 대치동 시절과 기독학생 총연맹(kscf)시절의 흐름을 정리해 보았다. 마침 최근에 기독학생 총연맹(kscf)에서 기독교교수 협의회에 활동에 대한 자료와 <80년대 기독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한 정책 협의회 사진과 새롬 교회를 세우신 남정길 목사님 (1981)이 이 정책협의회에서 강의하시는 사진을 올려주셔서 이번 기회에 새롬교회의 태동 배경이 되는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시대 정신을 한번 정리해 보게된 것이다.
kscf가 <80년대 기독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한 정책 협의회 사진의 설명에서 “광주민중항쟁 이후 엄혹한 시기의 학생운동을 학원과 거리 현장의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함께 하신 모든 분들게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 사진은 바로 광주민주화 항쟁 1년후의 사진인 것이다,
나는 연동교회 대학부 시절 당시 전북대 철학과에서 해직당하시고 장신대 신대원을 다니시면서 연동교회 대학부 담당 전도사님으로 오신 남정길 목사님을 처음 뵙게 되었고, 나중 서울 대치동에 새롬교회를 개척하신(1978.12)후 합류하게 되는데, 마침 기독학생 총연맹(kscf)에서 새롬교회 창립목사님이신 남정길 목사님이 kscf 정책 협의회 강의를 맡으신 장면의 귀한 사진이 올라와서 여기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롬교회는 1980년대 광주 민주항쟁 전 긴급초치 9호시절 당시 권력에 의해 해직당한 기독교 해직 교수에 의해 세워진 일종의 지식인교회로 탄생을 했고, 남정길 목사님은 늘 새롬교회의 의미를 한국교회 100주년을 기념하면 탄생한 지식인교회로 부르셨다, 이렇게 1978년 탄생한 새롬교회는 해직교수님이셨던 남정길 목사님이 다시 전북대로 복직하시면서 이원돈 전도사와 당시 새롬 교회 청년들과 함께 1986년 6월 약대동으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역사회선교에 기초한 민중교회로 전환한다, 그리고 2000년대 전반부터는 민중선교에 기초한 마을 교회로 한번 더 전환하게 된다,
지금 새롬교회가 약대동에 내려온지 34년이 넘은 이시점 이러한 역사를 돌이켜 볼수뿐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이 약대동에 내려올수 뿐이 없었던 그 모든 배경에는 바로 연동교회 대학생부, 기독교 교수 협의회와 기독학생총연맹과 같은 당시 민주와 정의를 부르짖던 단체들의 관계와 영향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분명히 하기위해 이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이번 2020 여름 잠깐 여름 휴가 다녀온 사이, 한국 교회가 75주년 8.15 광복절날 광화문 집회를 통해 완전히 사회적 신뢰를 잃어 버린 반지성적 반사회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느낌을 가질수 뿐이 없었다. 왜 한국교회가 다시 이성과 지성을 찾아야하는가 하는 생각으로 새롬교회의 초창기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초기 k에서 제공한 “한국기독교 교수 협의회 30주년사”이야기를 너무 반갑게 읽게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당시 기독교 해직교수님들과 당시 기독학생 총연맹의 청년활동가들과 연결되어 kscf와 고등부 간사로 한 5년정도 인연을 맺게되고 그곳에서 당시 각 신학교 신대원 학생들을 모아 "성서와 실천" 1.2 신구약 책을 쓰기 시작하던 일과 k 고등부 간사시절 어느날 kscf 학사단 활동의 하나인 빈민 활동 보고서를 보고 그 활동 보고서의 주 활동무대이었던 부천 약대동을 발견하고 답사하여 1985년 겨울 주민3가구가 살던 20평 규모의 구옥의 내부를 수리하여 겨울 성경학교를 출발로 부천 약대동 새롬교회(1986.6.8)를 출발하게 된 그 역사적 배경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가 “코로나 재확산 중심에 교회..교회 지도자의 무지와 자만, 욕망에서 비롯"이라는 성명서를 읽고 초기 새롬교회의 지식인 교회와 민중교회의 역사를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을수 없었고, 새롬 교우님들께 약대동 목회 서신을 쓸수 뿐이 없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의 안전과 안락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과 자연의 생명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와 목회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성명서 내용처럼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이웃과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동안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우리들만의 "행복"과 ‘천국’을 추구하는 교회 중심성을 드러내어 한국교회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무지와 자만, 욕망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신뢰가 붕괴된 거의 반사회적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오늘 이 사태의 그 모든 책임도 바로 우리 자신에 있기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향해 마땅히 큰 사죄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성명서 내용처럼 한국교회의 앞으로의 목표 역시 단순히 코로나19 이전의 ‘모이는 교회’로의 회복일 수 없습니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노력 속에, 인류공동체의 생명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이웃과 지역과 마을로 ‘흩어지는 교회’의 현장인 삶의 자리에서,보다 선명하게 새로운 중심을 잡아야 하고,
‘모이는 교회’의 시공을 위해 투자되던 자원이, ‘흩어지는 교회’의 삶의 현장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이웃과 자연의 생명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의 진정성은 ‘흩어지는 교회’ 즉 지역과 마을속에서 이웃과 타자를 향해 빛과 소금으로 나서는 삶과 사역을 통해서만 진정 어린 사죄의 마음과 진정성이 증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약대동 목회서신 7)
마지막으로 새롬교회 서울 시절 (1978-1985) 당시 지식인 교회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반경희 집사님과 함께 구입했던 약대동의 구옥이 그동안 새롬 교회, 새롬 어린이집, 새롬 지역아동센타 ,약대글방과 새롬 가정지원센타 등 모든 지역 프로그램을 인큐베이팅하고 이제 2020년 최종적으로 꼽이 마을 박물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 꼽이 마을 박물관이야 말로 약대동의 역사일뿐 아니라 바로 지식인교회 이었던 서울 새롬교회와 민중 마을교회인 부천 새롬교회의 모든 역사가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다.
1978년 한국교회 100주년의 기념으로서 새롬교회를 창립하신 남정길 목사님이 꿈꾸시던
지식인 교회로서의 서울 새롬교회와 1986년 지역과 민중을 섬기길 원했던 약대동마을의 새롬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며 , 2020 코로나 재확산시기에 반지성과 반사회의 중심으로 전락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반성하며 이 코로나 국면에서도 한국교회가 다시 예수님의 민주와 정의와 평화와 민중 사랑 정신으로 부활하기 위해 여기에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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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약대동 골목 골목길이 보이면서 약대동의 교회와 공부방 도서관이 붓이 되고 마을의 골목 도서관, 공원, 놀이터들이 꿈을 꾸고 꿈틀 꿈틀 다시 부활하며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오늘도 길거리밴드 (풍물패)와 골목벽화 .골목축제. 마을 놀이터 녹색가게, 녹색 장터등이 어울려 있고, 마을 전시회 공원 음악회 등이 열리고 있을것 같습니다 교회 도서관 공부방이 붓이되고, 마을이 캔버스가 되어 2000년전 갈릴리에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12 광주리가 남았던 그 놀라운 축제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 약대동에는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는 오늘도 약대동 마을을 덩실덩실 춤을추며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이 피리를 불면 우리도 함께 춤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이 피리를 불면 우리는 춤을 추고 그가 곡을 하시면 우리도 함께 울 것입니다. “아이들이 신나면, 마을이 꿈을 꾸고, 마을이 꿈을 꾸면, 도시가 춤을 춘다!! ”
새롬교회 서울 시절(1978-1985)당시 지식인 교회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반경희 집사님과 함께 구입했던 약대동의 구옥이 그동안 새롬 교회,새롬 어린이집,새롬 지역아동센타, 새롬 가정지원센타 등 모든 지역 프로그램을 인큐베이팅하고 이제2020년 최종적으로 꼽이 마을 박물관으로 거듭나고 있다.참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