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경기 부천시 약대동 주민자치센터 3층에 자리잡은 '신나는 가족
도서관'. 나른해 보이는 도서관 특유의 분위기를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99㎡(30평) 규모의 공간에 늘어선 서가 사이로 오가는 발걸음이 오전부터 분주하더니 주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한쪽에서는 4명의 주부들이 둘러앉아 무언가 열심히 토론하고, 다른 쪽에서는 10여명의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무언가 바쁘게 적고 있다. 수다스럽지만 그냥 동네 사랑방이라 하기엔 분위기가 만만찮다.
대학교 세미나실을 방불케 하는 '열공' 의 열기가 달떴다.
30대의 주부들은
영어 학습안을 짜느라 한창이었다. 대여섯 살 아이를 둔 엄마 6명이 돌아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엄마표 품앗이 교육'
모임이다. 이윤희(39)씨는 "사교육비 아끼면서 또래 주부들끼리
육아 정보를 공유하고 친목도 다질 수 있어 너무 좋다"며 웃었다. 다른 쪽은 늦깎이
한글 공부 모임이다. 할머니들과
결혼 이주 여성들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한글을 공부하고 있었다.
마을공동체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이 도서관의 관장은 인근 새롬교회의 이원돈(52) 목사. 이 목사가 1986년 부천의 대표적 서민지역인 이곳에 와서 개척한 새롬교회는 아직 교인 수 100여명에 머물고 있는 작은 교회다. 하지만 마을에서 담당하는 교회의 몫은 자못 크다. 1986년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1990년
공부방(지금은 지역아동센터), 2000년 가정지원센터, 2002년 가족도서관 설립 등으로 보폭을 넓히며 밑바닥 마을 복지의
그물망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문학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모임인 '수요 인문학 카페'도 운영하며 주민들의 정서적 갈증을 채우고 있는데, 지난주에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 홍세화씨를 초청해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이들 기구나
프로그램은 대부분 부천시가 지원하는 공인
복지시설로 인증 받았고 '작은 도서관 협의회'나 '푸른 부천21' '부천연합' 등 시민단체와의 연대 활동도 활발하다. 지자체 및 지역 시민단체와 결합해 '마을 가꾸기' 운동을 벌여가는 새롬교회는 그러니까 작은 교회의 대안적 목회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곳이다.
새롬교회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이나 각종 프로그램의 대상은 교회와는 무관한 마을 주민들이다. 종교적 색채도, 주민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노력도 별로 볼 수 없다. 이 목사도 교인 수를 늘리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마을 주민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더불어 사는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주민들이 성숙한 시민사회의 일원이 되면 그걸로 족한 거죠. 물론 특별히 종교적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으면 교인으로 받는 거고요." '마을 가꾸기'를 통한 선교 활동의 목표가 교인 수를 늘리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마을공동체에 스며드는 교회, 여기엔 주민들의 성숙한 공동체 의식이 곧
기독교 정신과 통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사실 이는 한국 교회의 아픈 곳을 찌르는 말이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교인 수를 늘려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만 혈안인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지역 선교에 나선 작은
개척교회들도 대형 교회의 성장을 흉내 내, 지역 복지시설을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 목사는 "교단 지도자들마저도 시민사회의 파트너로서의 교회의 공공적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성장주의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교회에 대한 신뢰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 가꾸기 운동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도 있다. 바로 정부 및 지자체와의 관계 설정이다. 예컨대 지역아동센터는 애초 기독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순수한 자원봉사였던 공부방이 정부의 지원을 받는 복지시설로 변모한 것인데, 재정적 지원은 얻게 됐지만 동시에 정부의 규제와 간섭도 받게 된 것이다. 이 목사는 "작은 교회들의 복지활동이 국가 복지체계에 흡수되면서 목사가
공무원처럼 되는 경향도 있다"며 "기독교 정신이 국가의 요구에 종속되지 않으려면 교계가 독자적인 사회복지망을 넓히는 데 더욱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